태풍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건 1953년이다. 같은 지역에서 여러 개의 태풍이 발생할 경우 혼선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첫 명명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상예보관 클레멘트 래기.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후 1978년까지 여성의 이름을 쓰다 “파괴적인 태풍에 왜 여성 이름만 붙이느냐”는 항의가 일자, 그 이듬해부터 여성과 남성 이름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름은 미국 태풍합동경보센터가 서양식으로 정했다.

그러다 2000년부터 한국 등 아시아 14개국이 10개씩 제출한 총 140개의 이름으로 교체됐다. 태풍 이름은 단명할 수도 있다. 피해가 큰 태풍 이름은 매년 태풍위원회에서 퇴출시키기 때문이다. 유사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가 2002년 8월 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루사’. 당시 124명이 숨지고 60명이 실종됐으며, 약 5조1500억 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말레이시아가 지은 이 이름은 ‘누리’로 바뀌었다. 2003년 9월 한반도를 강타한 ‘매미’는 ‘무지개’로 개명됐다. 북한이 작명한 이 태풍 역시 130명의 인명피해와 4조2200여억 원의 재산피해를 남길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퇴출된 태풍 이름은 지금까지 31개에 이른다.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은 태풍과 달리 알파벳 순서로 명명된다. 26자 중 이름을 짓기 어려운 Q U X Y Z 등 5자를 제외한 21자를 머릿글자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름 퇴출 관행은 태풍과 같다. 2005년에는 ‘카트리나’ ‘리타’ ‘윌마’ ‘데니스’ ‘스탠’ 등 5개의 허리케인 이름이 목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해 8월 말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를 덮친 카트리나는 허리케인 중 가장 강한 5등급으로, 2500여 명의 사망자와 1600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기록했다.

최근 텍사스주를 엄습한 허리케인 ‘하비’도 이름이 영구삭제되는 운명을 면치 못할 전망이다. 위스콘신 우주과학공학센터가 “1000년 만의 대홍수”라고 할 정도로 피해가 큰 까닭이다. 온난화로 인해 급증한 수증기가 물폭탄이 되어 쏟아진 것이다. 그런데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끝내 유엔에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그래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허리케인 이름을 기후변화 유발자의 이름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하비’가 ‘트럼프’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