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을 오가며 골프투어 사업을 하는 친구가 며칠 전 잠시 귀국했다며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요새 롯데가 와 이라노, 이거 실화가?”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이런 드라마틱한 팀이 또 어디 있겠나. 외국인 투수를 두 번이나 교체하는 난리를 피웠고, 심판들은 여러 차례 얄궂은 판정으로 열받게 했다. 사상 초유의 비디오판독 오심도 당했다. 전반기가 끝난 후 다들 롯데가 올해도 힘들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올해도 처음은 여느 해처럼 그랬다. 기억하는가. 롯데는 올 시즌 초반 상당기간 상위권에 머물렀다. 골수팬들은 또 ‘봄데’의 시작이라며 그러려니 했다. 역시나 롯데는 이후 계속 내리막을 탔다. 8월이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8월 1~3일 잠실에서 LG에 스윕당할 때까지만 해도 엘롯기동맹에서 롯데만 또 탈락하는구나 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말이다. 사직으로 넥센을 불러들인 롯데는 3연전을 스윕하더니 거짓말처럼 쭉쭉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압권은 지난 주말 사직야구장에 휘몰아친 붉은 물결이었다. TV를 켰다가 처음엔 월드컵 축구 재방송인 줄 착각했다. 다시 보니 야구장이다. 2만6000석을 꽉 채운 부산갈매기들이 똑같이 붉은 ‘동백유니폼’을 입고 끝없이 펼치는 파도타기는 장관이었다. 부산이 들썩거리고 사직구장 앞엔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구단은 올해 5년 만에 100만 관중 돌파가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뭐가 달라졌을까. 전반기 롯데 부진의 주범은 선발투수진의 난조였다. 시즌 시작도 전에 외국인 투수 파커 마켈을 보내야 했고 대신 데려온 에디튼도 결국 퇴출당했다. 레일리는 기복이 컸고 김원중은 아직 어렸다. 고참 송승준이 혼자 짊어지기엔 역부족이었다. 난세의 영웅 ‘안경 에이스’ 박세웅이 고군분투했다.

후반기 레일리가 각성하면서 투수진이 달라졌다. 린드블럼이 돌아온 타이밍도 좋았다. 선발진이 5인 완전체로 로테이션되자 과부하가 걸렸던 불펜도 기력을 회복했다. 왕년의 다승왕 조정훈이 돌아와 필승 조에 합류한 것도 큰 힘이 됐다. 마무리 손승락의 어깨가 그만큼 가벼워졌다. 공격 쪽에서는 ‘이대호 효과’와 강민호, 손아섭의 ‘FA로이드’가 시너지를 일으켰다. 특히 이대호는 전반기 상대 투수들의 몸쪽 공략에 속수무책 당하다가 해결책을 찾고서는 다시 상승 커브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다 조원우 감독의 기다림의 야구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조 감독은 성적이 부진할 때 인터넷에서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아무리 급해도 무리하지 않았다. 성장기에 있는 김원중을 지든 이기든 꾸준히 기용해 자신감을 키워줬다. 백전노장 송승준이 컨디션을 찾지 못하자 끈기 있게 기다려줬다. 긴 재활을 거친 조정훈을 욕심내지 않고 1이닝만 맡는 불펜으로 돌린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최준석을 밀당으로 자극해 120% 실력을 발휘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팀멘털이다. 몇 번의 역전승이 선수단 전체에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었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도저히 질 것 같지 않다”는 집단 최면에 빠지게 된 것이다. 올 시즌 69승 중 40승을 역전승으로 일궈내 리그 최다 기록을 세웠다. 기록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수단의 자신감은 적극적인 플레이로 이어졌다. 사직에 붉은 물결이 휘몰아치던 2일 경기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이 나왔다. 최준석이 안타를 치고 나간 뒤 포수가 볼을 놓치자 2루로 내달렸다. 무조건 아웃 타이밍이었지만 당황한 포수의 악송구로 살았고 강민호의 2루타 때 홈을 밟았다.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도 힘든 플레이였지만 자신감이 그를 2루로 뛰게 만든 것이다. 요즘 같으면 최준석과 이대호의 더블스틸도 가능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생각해보면 롯데가 사고 친 해는 ‘봄데’가 아니라 ‘가을데’였다. 1984년 전기 리그 4위에 그친 롯데는 후반기 힘을 냈고 최동원을 앞세워 우승했다. 1992년에는 ‘고졸 영웅’ 염종석이 어깨와 팔꿈치가 만신창이 되도록 던져 간신히 3위에 올라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도 하반기에 ‘진격의 거인’ 모드였다. 그리고 올해 롯데가 다시 미쳤다. 이제 남은 경기는 15경기. 집단 최면에서 깨는 순간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위기만 잘 극복하면 롯데의 끝은 팬들이 꿈꾸는 그곳일 수도 있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이대호는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NC와의 대결에서 이제 이길 때가 됐다.” “좋은 성적을 내면 팬들은 다시 야구장으로 와줄 것이다.” “롯데가 우승전력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도 분위기 타면 우승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이뤄졌다. 이대호의 마지막 약속은 지켜질까.

편집국 부국장 dol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