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 내가 사는 산골에 벌써 가을이 왔나 싶다. 이태 전에 마당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감나무에는 어린 감이 가을 햇살을 받아 푸르게 변해가고, 마당 한가운데 있는 모과나무에서는 벌써 열매가 탱글탱글해지고 있다.

이곳, 내가 사는 경남 산청에는 매년 가을이 오면 열리는 ‘한방약초축제’로 매우 부산하다. 벌써 17회를 맞는 이 축제가 대한민국 최고의 축제로 거듭나도록 모두가 열심이다. 그래서 마을 이장님이 직접 홍보지와 전단지를 손에 쥐고 아침부터 문을 두드린다. 아침 일찍 하우스에 물을 주고 난 뒤, 흐르는 땀을 씻어낼 새도 없이 그가 건네준 홍보지를 보다 보니, 문득 작년에 이곳을 찾은 그들이 떠오른다.

그들과 나는 5년 전 이맘때, 경기도 수안보 온천에서 만났다. 그곳은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일주일가량 은퇴 후의 설계, 재취업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공직생활의 마지막 연수였다.

그때 나는 그들에 비해 훨씬 젊었다. 학교장, 서울시 국장, 우체국장 등 화려한 위치에 있던 그들은 정년을 다 채운 상태였으나 나는 이제 갓 오십을 넘긴 나이로 명예퇴직을 신청한 상태였다. 처음 입소한 날에 같은 조에 배치된 나와 그들은 다소 어색했지만 금방 친해졌다. 어쨌거나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마지막이었고 평생을 보낸 직장을 끝낸다는 시원섭섭함이 우리를 그토록 빨리 엮어준 것 같다.

그들과 보낸 일주일은 내 직장생활 중에 제법 즐거웠던 추억이었다. 함께 술을 마셨고 노래도 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하지만 그런 모임은 대개 그렇듯, 그곳을 나온 순간부터 서서히 잊는 게 일반적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곳을 나온 뒤 몇 주 만에 시골로 들어온 내게 그들은 ‘7인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수시로 연락이 왔다. 처음엔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몇 번 주저했지만 나는 그들이 모이는 서울에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작년에는 ‘한방약초축제’를 핑계로 그들이 내가 사는 곳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들이 방문할 무렵, 나는 솔직히 귀촌 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였다. 연이어 낸 소설집이 실패를 거듭하여 아내와 다툼이 잦아지면서 경제적,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표정관리를 하며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대원사 및 중산리 계곡의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성대하게 열린 약초축제를 충분히 즐기고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집 앞의 평상에 홀로 막걸리를 마셨다. 노인 인구 10명 중 공적연금 대상자는 3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넉넉한 연금을 받는 그들은 대체로 행운아였다. 반면,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고 정년이 십 년이나 남은 직장을 그만둔 나는 시골에서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 못한 채,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그날따라 유난히 밝은 보름달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詩)처럼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겨드랑이가 갑자기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 평상에 앉아 있을 때 얼핏 내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 둘이 있었는데, 필경 그들은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들은 없고 식탁에 가지런히 놓인 만 원권 지폐 몇 장과 ‘아빠가 작가라서 난 자랑스러워요’라고 쓰인 쪽지가 있었다.

그로부터 벌써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에 난 마음을 다잡아, 잘 팔린다는 기약은 없지만 어쨌든 웹소설 두 권을 썼고 출판했다. 아무리 무명작가라 해도 글을 쓰지 않는 한, 작가의 생명은 끊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썼고 이제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작년에 그들이 떠나던 날, 이구동성으로 내년에도 꼭 오겠다는 말을 나는 허투루 들었다. 하지만 빈말이 아님을 최근에 알았다. 이번에도 그들이 온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데리고 유쾌한 표정으로 약초축제 현장은 물론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정취암을 포함한 ‘산청 9경’으로 안내하고 싶다. 그리하여 작년에 보여줬던 일그러진 나의 모습이 아닌, 최소한 아내와 딸아이의 뒷배가 탄탄한 시골작가임을 증명하고 싶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