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밤(현지시간) 미국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에 또 한 번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대통령과의 백악관 만찬을 마치고 나온 민주당 원내지도부의 입장 발표문이 신호탄이었다. “다카(DACA) 대상자 보호 방안을 조속히 법제화하기로 대통령과 합의했다.” 다카란 미국에 몰래 입국한 부모를 따라 들어왔다가 불법체류 신분이 돼버린 80만여 명의 청년을 추방하는 대신 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행정명령. 앞서 지난 5일 트럼프는 “미국 노동자 일자리 우선”을 내세워 다카 전격 폐지를 발표했다. 민주당과 여론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트럼프 지지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런데 불과 1주일여 만의 트럼프 입장 변경 소식에 지지층은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트럼프는 정신이 이상해졌다”(조 월시 전 공화당 의원) “누가 트럼프 탄핵을 원치 않을까”(극우 논객 쿨터)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반발 탓이었을까. 트럼프는 다음 날 민주당과의 합의설을 전면 부인했다. 그럼에도 여운을 남겼다. “합의의 대가로 심각한 국경 보안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추진하는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을 민주당이 찬성할 경우 다카 폐지 수용을 시사한 것이다. 전형적인 ‘정치적 밀당(밀고 당기기)’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정작 눈길이 가는 대목은 상하원 원 내 과반의석인 공화당의 지지를 업은 ‘미국 대통령의 야당 다루기’다. 그것도 독불장군식 국정 운영으로 많은 비판을 자초해온 트럼프 아니었던가. 특히 야당 상하원 원내대표 두 명만 따로 불러 정국현안을 논의한 사례는 전임 대통령 경우에도 그리 흔치 않았다. 이른바 ‘트럼프식 협치’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의 ‘야당 다루기’ 역시 트럼프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임기가 시작된 첫날인 지난 5월 10일, 첫 번째 정치 행보는 자유한국당 당사로 향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선거 당시 그렇게 부르짖었던 청산 대상인 적폐의 본거지 아닌가. “앞으로 야당과도 소통하고 대화하고 때로는 타협도 하고 국정의 동반자로 여기는 자세로 나아가겠다.” ‘문재인식 협치 선언’에 여론은 환호했다.
그러나 취임 첫날의 약속은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청와대 초청을 두 번이나 걷어 차버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역시 ‘선명야당’을 기치로 대통령과 정치적 대립각을 키워나가고 있다. 헌정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인준안 부결 사태는 어그러진 여야 협치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청와대 측은 분노했다. 여당 대표는 한 발 더 나갔다. ‘땡깡’이라는 비속어로 ‘캐스팅보터’ 국민의당의 몽니를 질타했다. 분은 어느 정도 풀렸을지 모르나 상황은 악화일로다. 당장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안은 표류 중이다. 설사 내일 당장 표결에 나서도 뜻대로 된다는 보장은 제로(0)다. 민주당 121석에다 우군 표를 다 합쳐도 과반에 20석이나 못 미친다.
그래서 나온 말이 ‘Again 1988?’. 13대 총선 뒤 ‘1노3김’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사실상 식물정부로 전락했던 노태우 정권의 전철을 되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 비롯됐다. 그렇다고 1990년 3당 합당처럼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억지로 여대(與大)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 문 대통령의 안보정책 후퇴에 대해 최측근 김경수 의원은 모 기자의 표현을 인용, 지지층 양해를 구한 적이 있다. “굴욕을 감내하면서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다.”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왜 야당과의 관계에선 이런 각오를 하지 못할까. 홍 대표의 청와대 초청 거부의 변은 “들러리 서기 싫다”는 것이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여야 대표 집단 회동이 아닌 ‘1:1’ 개별회동으로 발상을 바꾸면 어떨까. 그래도 만나주지 않으면 다시 당사를 찾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일회적인 게 아니라 대통령 임기 내내 이렇게 하고 싶다.” 취임 당일 방문 때 이렇게 약속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트럼프처럼 사사건건 야당과 밀당식 정치적 거래를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한 발짝 더 다가가, 낮은 자세로, 가슴을 열고 야당과 자주 만나 얘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다 간혹 야당 손을 들어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알 만한 국민은 다 안다. 누가 더 진정성이 있는지, 결국 누굴 밀어야 할지를.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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