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기억의 한 토막. 부산의 한 대학 예술대학 학생들이 ‘학내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그 배경은 이랬다. 교수 두 분이 공연이 있을 때마다 도시락을 가져오도록 했는데, 이 도시락이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지정한 초밥집에서 사 오도록 했다는 것. 이른바 ‘찐쌀’ 팔아서 대학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학내에서 많은 공분을 산 것은 당연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조금 흐른 뒤 기자는 ‘두 분’ 중 한 분을 사석에서 만나 그때의 일을 되새겨볼 기회가 있었다. 대답은 “사실관계는 맞다. 하지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나도 제자일 때 그렇게 했다. 그런 걸 온 동네방네 알리고. 그것도 잘못된 게 아니냐”인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요즘 용어로 따지면 그것은 ‘갑질’이었다.
뜬금없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왜 꺼내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도 ‘본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늦깎이로 대학원을 다니던 지인이 학위논문을 준비할 때 마음고생 하던 것을 지켜봤을 때도 그랬다. 논문 내용을 제대로 봐주는 것도 아닌데 ‘사례비’가 오갔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관례이거니 하겠지만 ‘사제지정’으로 포장할 사안은 아니다. 내밀한 사정을 들추자면 이보다 더한 게 많은데, 이 자리에서 줄이겠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몇 마디로 우리 대학사회 전반을 폄훼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됐을 때 반가웠다. 더는 까닭도 없는 학위논문 사례비 얘기가 없을 것이고 ‘초밥 도시락’을 싸갈 일도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액면 그대로’ 하면 됐다. 원하지도 않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관행이라는 이유로, ‘정(情)’이라는 이유로 억지춘향격으로 나설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청탁과 접대가 일상적이던 우리 문화를 뿌리부터 바꾸자고 우여곡절 끝에 도입한 청탁금지법이 28일 시행 1년을 맞았다.
음식물·선물·경조사비 상한액을 정한 이른바 ‘3만·5만·10만 원’ 규정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청탁금지법은 일선 학교를 비롯한 공공부문에서 무난하게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정이 떨어질 만큼 자리잡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부산의 한 공무원은 청탁금지법 시행 1년의 성과에 대해 “대환영”이라고 말했다.
이 법의 제정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석좌교수는 청탁금지법 시행 1년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법에 대한 보완 요구, 거부 반응, 저항감 등을 고려할 때 애초 의도한 바에서 그 정도 달성했다”고 본 것이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셈이다. 김영란 교수는 “이 법의 내면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불공정,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 엘리트 의식에 대한 억울함 등의 감정이 일정 수위에 올랐다”고 지난 1년을 평가했다.
김영란 교수는 청탁금지법을 ‘처벌이 아닌 거절의 방법을 알려주는 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익숙하던 것을 바꾸자는 것이니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 법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갔다는 것”이라고 했다. “정이란 참 좋은 것”이지만 정에 얽혀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교수가 대학원생의 학위논문을 잘 봐주고, 수사관이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게 아주 고마운 일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우리가 지키고 널리 퍼뜨려야 할 정(情)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게 요즘 세상에 맞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청탁금지법은 앞으로 더욱 정치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강원랜드 채용 비리 의혹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청탁금지법의 제정 과정에서 빠진 이해관계충돌방지 조항인 ‘금수저 방지’ 규정을 추가하는 게 옳다. 이해관계충돌방지 규정이란 쉽게 말해 ‘내가 내 자녀를 특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더는 불공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더욱 그렇다. ‘3·5·10’ 규정 역시 현실에 맞게 세밀하게 다시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따지고 보면 청탁금지법은 ‘없어도 될 법한 법’이 되는 게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있으므로….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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