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런저런 일의 연장선 속에서 과연 내가 살아온 방법과 해온 일들이 옳았었나, 묘한 박탈감과 허탈함이 찾아왔다.

진정으로 내가 한 일을 후회한다면 반성하고 새롭게 길을 찾으면 될 텐데 마음에서는 여전히 그 길이 옳다고 하는데 세상이 내 뜻을 몰라주고,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아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럴 땐 무엇이라도 내가 잘살고 있다는 믿음을 전해줄 따뜻한 위로가 정말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뜻밖의 사람에게 뜻밖의 푸근한 위로를 받았다.

강원도 속초의 오래된 마을로 이사를 간 지 4년째다. 일 년에 두 번 찾아오는 명절인 추석, 설에 우리는 떡방아 집에 직접 떡을 맞춰 마을 어르신들에게 돌리곤 했다. 처음 이유는 낯선 마을에서 이질적으로 떠돌지 않게 잘 좀 봐 달라는 아부였지만, 이후에는 양가 부모님을 모두 여윈 우리 부부에게 묘한 명절 행사가 돼 버렸다.

올해는 뜻하지 않은 선물이 되돌아왔다. 직접 논농사를 짓고 계시는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떡 한 접시의 보답으로 자신의 논에서 수확한 벼를 도정해 뽀얗고 하얀 쌀 한 자루를 우리 집 마당에 두고 가신 것이었다. 떡 한 접시를 쌀 한 자루로 돌려받으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데 다행히 우리가 없는 틈에 비라도 맞을까 봐 처마 밑에 잘 두고 가셔 하루가 지나서야 그 예쁜 쌀을 만났다.

이 쌀을 보고 있자니 최근 들어 마음을 우울하게 했던 일이 녹아들면서 아직은 우리가 그래도 잘살고 있나 보다, 정말 위로가 됐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이게 바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라며 신이 나서 아껴 두었다 차례상에 먼저 올리고 애들이 오면 밥해 먹이자고 야무진 계획도 세웠다.

속초 집에는 이 집을 지어질 때쯤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밤나무가 있다. 이 밤나무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엄청난 양의 밤송이가 떨어지는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정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호주머니에 양 손 가득 주운 밤알이 가득할 정도다.

밤을 보관할 때는 수분의 증발을 막는 것이 중요해 큰 항아리에 모래를 먼저 담고 켜켜로 주운 밤을 묻어두는 중이다. 사실 우리가 이 집을 샀으니 우리 밤나무라고 해도 누구 하나 딴지를 걸리 없지만, 이 집을 지을 때 이 밤나무를 심었을 그분 덕에 지금의 우리가 이 밤을 먹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심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 인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종종 일어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는 나무를 심고, 누군가는 키우고, 누군가는 열매를 따는 시차가 존재한다. 이 모든 일이 내 생애 다 일어나 내 노력의 결실을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다면 세상 참 공평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노력도 없이 열매를 받는 일에는 당연하게 생각하다, 열매를 딸 수도 없는데 심어야 할 일이 생기면 억울함이 앞선다. 정말 이게 억울한 일일까?

우리나라 산은 유형이 좀 독특해서 식물 대부분이 스스로 자랐다기보다는 사람이 묘목을 심어 가꾼 육림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을 긴급하게 복구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목일까지 만들어 전 국민이 나무 심기에 온 힘을 다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나무들이 수십년 동안의 보호 속에 잘 자라 우리의 산을 이렇게 풍요롭게 덮고 있다.

얼마 전 자문위원으로 산림청 회의를 나가니, 이제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산에 나무를 심고 보호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이 산림을 국민에 돌려주는 ‘산림복지’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조부모, 부모 세대가 심은 나무 덕을 이제 막 쉰 살을 넘긴 나와 다음 세대가 보게 될 셈이다.

느리게 자라기로 유명한 노각나무를 3년 전 우리 마당에 심으며 우리 부부는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도 난다. 과연 이 노각나무가 언제 자라 아름드리 나무가 되려나! 지금 우리가 심는 나무는 어쩌면 내 세대가 아니라 우리의 딸·아들 세대 혹은 그다음 손자 세대에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 나에게 돌아올 결과가 아니라면 이 일을 왜 하나 싶지만 누군가의 심는 일이 끊기면 후손의 조상 덕 볼 일도 결국 사라진다.

요새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던 억울함도 실은 내가 한 일에 대한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경험한 세상과 자연은 내가 주는 ‘되’를 ‘말’로 돌려준다는 것이다.

그게 선이든 악이든 무엇이 됐든 선한 의지를 열심히 심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아본다.

가든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