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왕조시대의 역관(譯官)은 단순히 외국어 통역만 하는 기능인이 아니었다. 비록 사회적 신분은 중인이지만, 어엿한 외교사절이자 문화 전파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는 지식인이었다. 때론 역량이 사신(使臣)을 능가하기도 했다. 1763년(조선 영조 39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언진이 그랬다. 이언진의 당시 활약상은 박지원이 지은 그의 전기 ‘우상전’에 잘 나와 있다.

박지원은 그가 일본인들의 요청을 받을 때마다 즉석에서 한시를 지었는데, 마치 미리 지어놓은 것을 외우듯이 했다고 전했다. ‘맨발의 왜놈 사내 몰골조차 괴상한데/녹색 윗도리 등엔 별과 달이 그려져 있네/꽃무늬 적삼 입은 계집들 달음질해 문 나서니/머리 빗다 못 마친 양 그 머리 동여맸네’. 방일기간 이언진이 지은 시 ‘승본해’에는 일본인의 옛 모습이 생생하다. 박지원은 “붓대 하나로 한 나라(일본)를 무너뜨린 거나 다름없다”고 평했다.

홍세태 또한 이언진 못지않은 문명을 일본에 떨친 역관이다. 그는 1682년(숙종 8년) 도일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종이와 비단을 가지고 와 시묵(詩墨)을 구하는 일본인이 늘어섰다. 시묵을 보배로 간직하는 것은 물론 그의 모습까지 그려 집에 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시비 당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오네/마음 비우고 영욕을 멀리한다/사람 없는 조용한 밤 지게문 닫고 눕자/들려오는 시냇가의 솔바람 소리’. ‘우음’이란 제목의 시다. 일본인들이 매료됐던 홍세태 문학세계의 전아하고 그윽한 풍격이 엿보인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통신사 활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역관은 국제 동향이나 외국의 선진문물을 가장 먼저 접하고 국내로 받아들여 사회변화의 밑거름이 되게 했던 사람이라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그러면 우리나라 역관의 기원은 언제일까. 최근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리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남녀 역관의 그림이 확인된 것이다. 해당 인물들의 옆에는 먹글씨로 ‘통사리(通事吏)’라는 관직 명칭이 적혀 있다고 한다. ‘통사’는 고대 역관의 명칭이며, ‘리’는 하급관원을 통칭하던 말이다. 삼국시대에도 역관이 외교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셈이다. 한미·한중 정상회담 등 대형 외교 현안들을 앞둬서일까. ‘외교전사’ 역관의 존재감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