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상을 갈무리할 즈음 TV 시청은 손쉬운 여가 방식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골든타임대의 프로그램들이 상호경쟁적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거기에서 TV 드라마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다변화된 방송환경에서 TV 드라마는 방송국별, 시간대별로 방영되는 게 적잖다. 습관처럼 TV 드라마를 돌려봐도 구분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TV 드라마가 일반 시청자들에게 주목받기 힘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TV 드라마가 여성의 전유물로 폄하되었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드라마’로 간주되기도 힘들다.

최근 케이블방송에서 방영 중인 ‘부암동 복수자들’이 중년층 여성들에게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두루 알다시피 TV 드라마는 낯익은 동시에 낯선 기제로 대중성을 획득해왔다. 구태의연함과 친숙함, 그리고 기발함과 어색함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청자들이 당면한 현실과 기대감을 완충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르 문법이 다양화하는 만큼이나 혼융되는 게 다반사가 되어가지만, 시청자층을 중년 여성으로 대놓고 특정한 경우는 보기 드물다. 괜한 호기심의 발로랄까, 역주행을 마다하지 않으며 ‘부암동 복수자들’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소개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재벌가의 딸, 전통시장 생선장수, 그리고 대학교수 부인까지 살면서 전혀 부딪힐 일 없는 이들이 계층을 넘어 가성비 좋은 복수를 펼치는 현실 응징극’으로 규정되어 있다. 방영 중인 까닭에 ‘가성비 좋은 복수’의 면면도 진정한 ‘현실 응징’의 귀결 방식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세 명의 중년 기혼여성, 그녀들이 전유하는 현실이 대체 무엇이며 복수를 겨냥한 심리적 저변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우선, 그녀들이 전유한 현실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밀월로 여성에 대한 차별에 내팽개쳐져 있거나 언제든 그럴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재벌가의 혼외자로 자라나 남편의 혼외자를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정혜, 대학교수 부인이라는 번드레한 지위와 달리 매 맞는 아내인 미숙, 생선장사로 생계를 전담하지만 ‘비린내’라는 냉대에 부대끼는 도희, 어느 누구도 차별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도 그것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사회를 떠받드는 가부장제가 당위적 현실을 재구성해가며 고착되어왔음을 전경화하는 것은 아닐까. 1989년 TV 드라마화한 이경자의 ‘절반의 실패’가 사회 전반에 팽배한 여성에 대한 차별문제를 다뤄 크게 반향을 이끌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부암동 복수자들’이 그 시절 문제 삼았던 소재들로 중년 기혼여성들을 다시 흡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런 가운데 여성 주인공들이 변화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은 분명 달라진 면모다. 이를 위해 그녀들은 각자도생하는 대신에 연대를 꾀한다. 그 연대는 자매애를 넘어 상징적 가족을 재구성함에도 여전히 엉성하다. 그녀들은 복수를 꿈꾸지만, 정작 복수할 배포도 구체적 방법도 없다. 새로운 혼외자 준의 영입이 없었다면, 그녀들이 바랐던 합법적인 범위의 소심한 복수조차 답보상태였을 것이다. 침묵과 인내를 선택했던 조남주의 ‘1982년생 김지영’처럼 여성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는 일은 그만큼 힘겨운 일임이 틀림없다.

‘부암동 복수자들’에서 복수라는 장치는 다분히 양가적이다. 그녀들 스스로 가족이나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행위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특히 후계자 선점을 위해 혼외자를 ‘당연히’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정혜도, 교육감 당선을 위해 가정폭력에 침묵한 채 ‘마땅히’ 동참당하는 미숙에게도 ‘가족 모두를 위한 것’으로 포장된 남편의 가부장성은 상처를 골 깊게 한다. 남편의 지독한 이기주의는 가부장제 논리 아래 어쩔 수 없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고 합리화된다. 이때 그녀들의 상처는 철저히 도외시되며, 그들을 향한 복수 또한 그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덧나게 할 위험이 상존한다. 더욱이 그녀들의 복수는 여성의 주체성 회복보다 모성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적잖다. 그녀들은 끈끈한 연대를 통해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점차 말할 수 있는 여성으로 거듭난다. 그럼에도 엄마라는 기표와 결합하는 순간 언제든 제도적 모성의 수호자로 후퇴할 수 있다.

지난주 1주년을 맞은 촛불집회는 “적폐 청산과 사회 대개혁을 위해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한 발걸음은 이념과 지역과 계층과 세대의 분열을 조장하기보다 다양성을 아우르며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여성문제 또한 더는 ‘복수자들’을 양산하지 않도록 여성들의 일상을 제도에서 공감까지 상생의 실천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