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전쟁터인 외교무대는 정의보다 국익이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다수가 비난하는 비도덕적 언행이라도 경제력이나 무력으로 밀어붙여 정당화하기 일쑤다. 최근 유네스코에 대한 분담금 납부 거부를 무기 삼아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저지시킨 일본 사례가 대표적이다. 중국이 자국의 반체제 지도자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지지한 노르웨이에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중단을 비롯한 경제 보복을 6년간 가한 끝에 작년 12월 굴복시킨 것도 그렇다.
국제사회는 이런 행태를 ‘수표책 외교(checkbook diplomacy)’라고 꼬집어 말한다. 막대한 경제력을 앞세워 원하는 바를 관철하는 외교라는 뜻이다. 최근 봉합된 한국과 중국 간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갈등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은 전방위적 경제 보복을 통해 우리에게 관광 분야 9조 원을 포함한 22조 원이 넘는 손실을 떠안겼다. 22조여 원짜리 ‘부도수표’를 발행한 셈이다. 사드 배치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근본원인은 핵·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북한과 미국 간의 대립을 낳은 분단에 있다. 다시 말해 ‘분단비용’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 손실은 일부분일 뿐이다. 미중의 전략적 완충지대에 놓인 남북이 지출하는 분단비용은 천문학적이다. 우리를 상대로 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수표책 외교’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은 F-35A 합동타격전투기, KF-16 전투기 성능 개량, 패트리어트 PAC-3 성능 개량, AH-64 아파치 대형공격헬기, 글로벌호크 고고도 정찰용 무인기, 이지스 전투체계 등 미국산 무기 프로그램을 구입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100억 달러 이상의 첨단무기를 팔았다고 트위터로 자랑했다. 앞으로 한국이 끊어준 수표가 미 방산업체들의 주머니에 속속 들어갈 것이다. 이 또한 고스란히 분단비용이다.
한미정상회담 공동발표문의 절반 이상이 그 무기와 기업 거래 내역이다. 외교문서라기보다 비즈니스 계약서를 보는 듯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미국산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2006년 방위사업청이 설립된 뒤 작년까지 총 36조360억 원어치의 미국산 무기를 사들였다. 무기 구매량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도무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북미 갈등 탓이다. 제재와 압박에 치우친 미국과, 자국에 대한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폐지되길 바라는 북한 간의 평행선은 끝없는 군사적 긴장을 부른다. 이런 상황에선 분단비용의 증가는 불가피하다.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 걸까. 답은 간명하다. 통일이 최선책이지만, 이는 요원한 얘기다. 그러면 남북 평화공존의 차선책을 도모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방한 때 우리 국민 다수가 ‘반전(反戰)’을 외친 이유다. 북미의 주장을 고려해 ‘북핵·미사일 개발’과 ‘대북 적대시 정책’을 동시에 중단하고 양국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방안을 추진할 만하다. 하지만 공동발표문에는 대화와 협상 같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문구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대신 북한의 위협에 대해 핵과 재래식 전력을 망라한 모든 범주의 군사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한국의 첨단 군사자산 획득과 미국 전략자산의 순환배치를 확대한다는 군사적 대응책만 빼곡하다.
이래선 북미, 남북 대립 격화와 분단비용 증가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이런 우울한 현실과 대조적으로 미국의 군수산업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북핵 대응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무기 수요가 늘어나는 데다, 이슬람국가(IS) 소탕전 등으로 중동에서도 무기 구매가 줄을 잇고 있어서다. 미 방산업체들의 주가도 크게 올랐다. 보잉(60% 이상), 레이시온(25%) 등 대표적인 업체들의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주가 상승률이 다우지수 평균 상승률인 13%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낮은 국내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의도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무기 판매와 무역 불균형 해소에 더욱 매달리고 있다. 한일 방문 중에도 그런 발언을 직설적으로 쏟아내 주위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미국은 항상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 공격이 이뤄질 경우 미 군수산업은 이라크 전쟁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른 나라의 불행을 축재 기회로 삼는다니, 우리 처지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다를 바 없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게 한반도를 둘러싼 냉엄한 국제 현실이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중국 대륙의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조정이 자초한 남한산성의 낭패와 치욕은 오늘날에도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사드에서 한미, 한중 정상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린 ‘슈퍼위크’까지 격랑의 외교무대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논설위원 yisg @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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