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북 포항을 덮친 규모 5.4 지진으로 90명이 부상을 당하고, 1800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난해 9월 발생한 경주 지진보다 규모(5.8)가 작지만 피해 정도는 더 크다. 지역 내 민간시설 9000여 곳, 공공시설 600여 곳이 피해를 봤다. 경주 지진으로 23명이 다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포항 지진의 위력이 경주 지진의 4분의 1에 불과한데도 인명 피해는 4배에 육박한다.
이런 원인으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됐다. 진앙이 경주보다 얕았고 도시에서 발생했다는 점도 설득력 있게 들렸다. 무엇보다 액상화 현상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땅이 물렁물렁해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액상화 현상은 연약 지반에 있는 물과 모래, 진흙 등이 지진의 충격으로 흙탕물 상태로 지표에 분출된 후 땅이 내려앉는 것이다. 부산대 손문(지질환경과학과) 교수팀이 포항지진에서 이를 발견했고, 국제신문이 이를 신속하게 보도했다.
액상화 지진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일본과 멕시코 등지의 과거 대지진을 보면 알 수 있다. 1995년 발생한 규모 7.3의 고베 대지진(효고현 남부 대지진)은 항구도시 고베에 가장 큰 피해를 안겼다. 한신 고속도로 일부와 신칸센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아파트가 늪에 빠진 것처럼 푹 주저앉았다. 6434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됐으며, 4만3792명이 부상을 당했다. 주택 10만여 채가 전파되는 등 재산피해가 무려 10조 엔에 달했다. 이는 당시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5%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진이 효고현 남부를 강타했지만 피해 정도는 북쪽에 위치한 고베가 심했다. 항구도시인 고베의 건물 대부분이 바다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띠었다.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기 10년 전에는 멕시코에서 규모 8.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1985년 터진 이 지진으로 9500여 명이 숨지고, 3만여 명이 다쳤다. 멕시코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멕시코 국민은 큰 피해를 봤다. 전문가는 피해가 컸던 원인으로 액상화 현상을 꼽았다. 진앙은 멕시코 서부 해안가였으나 정작 수백 ㎞ 떨어진 멕시코시티의 피해가 컸다. 호수를 메워 만든 멕시코시티는 지반이 약해 액상화 현상이 일어났다.
기상청이 관측한 이래 큰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부산 역시 해안가를 따라 매립지가 많다.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부산은 또 낙동강을 끼고 있어 강 주변에 연약지반이 많다.
포항지진을 액상화 지진이라고 규정한 손 교수는 “굳이 부산이 아니라도 인근 울산이나 양산 등에서 강진이 발생하면 지역에 큰 피해가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액상화 지도를 만들어 이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부산시도 대책을 마련하려고 지진 관련 용역을 발주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지진 전문가를 채용했다는 말도 들린다.
액상화 지진의 위험성을 몸소 느낀 일본은 이미 전국 토지의 액상화 위험도를 표시한 ‘액상화 지도’를 만들어 공개했다. 이 지도를 보면 지역별 위험도를 5단계로 나눠 표시하고, 과거 이 지역 어느 곳에 어떤 지진이 발생했는지도 나온다. 건설업계는 건축물과 구조물을 지을 때 이 정보를 활용한다고 한다. 건설사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파일을 얼마나 깊이 박을지, 지하수를 어느 정도 빼낼지 등을 결정한다. 설계 과정에 액상화 현상을 반영하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가. 아직 이런 지도 하나 없다. 토목건축을 전공한 국내 한 대학 교수 연구팀이 한반도에 강진이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 액상화 등 위험 정도를 나타낸 연구 결과물을 올해 정부부처에 제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 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 관계자가 이 교수에게 연구 결과를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정부는 세월호 사건을 벌써 잊었나 보다. 국민에게 안전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나. 경주와 포항의 연이은 지진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지 정부는 모르는 듯하다. 그 신호를 무시했다가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집값이 떨어지는 것보다 국민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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