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고 있다. 가을이 떠난 자리를 대신해서, 익숙하지만 썩 반갑지만은 않은 계절이 올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달려 있더라는 알쏭달쏭한 문구를 생각하니 벌써 이듬해의 가을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다. 떨어져버린 모든 것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표정과 분위기를 달리해서 다시 등장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한 가지 법칙 아니겠는가. 가버린 것, 그리고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최근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환생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느 시인의 연애 스캔들을 둘러싼, 이미 드러난 사실을 두고 의견이 갈린 데서 그것의 ‘표정’이 보였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만 대체로 1960, 70년대나 이전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보수적 가치관’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느꼈던 당혹감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필자가 전후 맥락을 삭제하고 뭉뚱그려 ‘보수적 가치관’이라 표현한 까닭이 있다. 이 말 자체는 하등의 가치 판단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가치중립적인 용어일지라도 쓰이는 맥락과 배경에 따라 그 용어나 말에 확고한 가치 판단이 녹아든다.

의견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도 우리는 불쾌할 필요가 없다.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의견 피력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공감의 넓이와 깊이는 확장된다. 만약 ‘보수적 가치관’이라 표현했던 필자의 ‘주관’이 또 하나의 가치체계에 토대를 둔 것이라면 나 또한 엄연히 이데올로기라는 함정에 빠져 들고 만다.

우리 사회에 충돌하는 소위 이념적 분쟁을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사고나 의식은 그 사람이 살아온 생활세계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만들어준 시간과 공간이 ‘보수적’이라면, 그가 생각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진보는 보수의 뒤통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부정하고 깨뜨리려는 노력과 의지 없이 손쉽게 떠벌리는 ‘보수’와 ‘진보’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즉 허위의식인 것이다.

‘그땐 힘들었어도 행복했지’라거나 ‘없이 살아도 그런 낭만이라도 있었다’는 식의 말에 감추어진 무의식을 본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술혼이나 시혼과 같은 그럴싸한 말로써 ‘플라토닉 러브’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지속적으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예술가일수록 사적인 영역은 베일에 싸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밀의 커튼은 어느 누가 걷어 올리더라도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제각각의 주관만을 양산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럴 만한 말 못할 사정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이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 혹은 그라서 그런 일조차 아우라의 후광을 입어 중화시킬 수가 있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제아무리 유명하고 권세가 특별하더라도 그 이름값으로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하는 후세인들이 있다면 그의 명성은 한갓 떨어지는 낙엽의 운명처럼 짓밟히고 파묻히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저 추락하는 가을처럼 모든 것을 떨구고 가야하는지도 모른다.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움켜쥐었던 모든 것을 시원하게 놓아버린 채, 다만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상과 이념이 있었기에 인간사회가 이 정도나마 문명의 꼴을 갖추었다. 그런데 사상과 이념이라고 하는 온갖 ‘주의(主義)’는 또한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요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진작 가버린 줄만 알았던 낡은 이념의 환생에 필자가 흠칫 놀랐던 까닭도, 혹시 내게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를 허위의식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허물이나 허점은 대개 세계를 통찰하고 다른 존재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훌륭한 거름으로 놓인다. 죄가 있으니 나아가야 할 길도 훤하다.

차고 기우면 천길 나락으로 떨어져서 사라져버리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다시 찾아올 그를 생각함은 어인 일인가. 그러기에 다시 되돌아올 가을을 얘기하면서, 실은 나 자신이 떠나보냈다고 여겼던 그 옛날의 객기에 심사가 쏠렸던 건 아니었는지. 한 계절의 끄트머리이자 새로운 계절의 이맛머리에 우리는 당황하며 서 있다. 아쉬운 것은 한창 자기와 씨름하면서도 서로를 감싸 안고 울며 웃다가 홀연 떠나버린 존재들이다. 드는 자리는 낌새 없이 오는 둥 마는 둥 들어오지만 나는 자리는 기별도 없이 자취를 홀연 감추고 만다. 이것이 미련이라는 이름이라면 이도 조만간 지나가리라.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