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어두워지고 늦게 해가 뜨는 계절 탓에 일찍 저녁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잠 깨는 날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뿌연 서쪽 창으로 눈이 오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아, 눈이 오시네!’라고 중얼거리며, ‘착각’을 ‘현실’로 만들어 그 안에서 대책 없이 눈을 맞습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나그네의 꿈을 꿉니다.

북위 35도 아래, 따뜻한 군항도시에서 태어난 시인의 숙명은 눈에 대한 치열한 시를 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북방적이고, 황량하고, 광활한 시를 써보기엔 제 상상력이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남북이 가로막힌 현실 속에서 남쪽에서의 상상력의 크기는 늘 달걀만한 것이어서 기껏 큰 뜻을 품어야 장닭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오로라 백야 등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눈을 기다리는 일이 이 지역에서 힘이 듭니다.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 태어나 고향을 지키며 소설을 쓴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에 ‘북해도는 눈이 내리기 전이 되면 으레 젖빛의 작은 날개 달린 벌레가 날아다닌다. 날아다닌다기보다는 오히려 떠돌아다니는 운치가 있어서 사람들은 추위를 맞이하기 전의 긴장감이 잠시 잊혀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는 눈이 오기 전의 푸근함을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경험이 부러웠습니다.

겨울이 일찍 시작된 올해 벌써 눈 소식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에도 경기와 충청지역에 ‘대설주의보’까지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남동지역은 눈이 귀합니다. 이 나이에 아직 첫눈이라는 말에 가슴이 뜁니다.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눈 내리는 풍경을 그렸다며 하얀 빈 도화지를 내밀 수밖에 없는 삭막한 제 정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가 난생 처음 눈을 만난 곳은 할아버지 댁이 있었던 양산이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였고, 전출이 잦은 아버지의 직업 탓에 할아버지 댁에 맡겨져 자랐습니다. 어느 겨울, 잠을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마루에 나갔는데, 마당이 불을 밝힌 듯 환했습니다. 하늘엔 달이 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눈이 내려 마당과 이웃한 집들의 지붕까지 하얗게 덮고 있었습니다.

고모들에게 눈이란 것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기에 눈이구나, 인식할 수 있었으나 부풀어버린 오줌보를 참을 수 없어 달빛이 욜랑욜랑 부서져 내리는 눈밭에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할머니 곁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할머니는 차가워진 제 몸을 꼭 안아주셨는데 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가는 말처럼 ‘할머니 눈 왔어’라고 중얼거리며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눈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아침 햇살에 거의 다 녹아버리고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문학의 북방정서를 좋아합니다. 백석 시인과 이용악 시인이 해금이 돼 한국문학사로 복귀했을 때 그 차가운 맛에 독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용악 시인의 시 ‘북쪽’은 짧아도 절창이고, 시 ‘그리움’은 눈이 그리울 때 중얼거리는 주문 같은 애송시입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연달린 산과 산 사이/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이용악의 시 ‘그리움’)

이용악 시인의 시는 함박눈이 오는 풍경을 그림처럼 펼쳐냅니다. 백무선은 양강도 백암과 함경북도 무산을 잇는 187.4㎞의 철길이라고 합니다. 그 철길 위로 석탄을 실은 화물차는 함박눈이 내리는 속도처럼 느릿느릿 달립니다. 고향을 떠나온 밤은 잉크병 속의 잉크가 어는 추운 밤이며, ‘어쩌자고’ 잠이 깬 시인은 고향에 내리던 복된 눈을 생각합니다.

어제 동지를 지났습니다. 이제 밤은 제 꼬리를 잘라먹으며 낮이 점점 길어질 것입니다. 이는 음기(밤)가 극성한 가운데 양기(낮)가 생기는 일이어서 동지를 일 년의 시작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긴 밤 끝에 새해를 맞이하듯 새 아침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적바림에는 한 해를 보내며 마무리 할 일이나 새해를 맞이해 새로운 계획으로 바쁜 연말입니다. 한 해가 시작될 때 두툼했던 시간의 지갑 속에 동전 몇 푼 남은 기분입니다. 나라의 일이나 사람의 일이나 마침표를 잘 찍어야 다음 문장이 술술 풀리는 법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일보다 떠나가는 해를 매조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저는 여전히, 느닷없는 폭설을 기다리겠지만 시간은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을 시간입니다. 송구 정유(丁酉), 영신 무술(戊戌)! 두루두루 만사형통하시길.

시인·경남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