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티가 무슨 죄인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가까이는 충북 제천 화재 현장에서, 좀 멀리는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 어느 건물의 뒤틀리고 무너진 기둥에서 이 이름을 발견한 사람들의 느낌은 물론 제각각일 테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는 무엇보다 거대한 지붕을 떠받치며 늘어선 배흘림기둥,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로티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서양 건축 양식이지만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발표한 ‘현대 건축의 다섯 가지 원칙’ 가운데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남들이 뭐라든 필로티를 꼽은 그의 이유는 몹시 명쾌하다. 건축물이 차지한 자리를 대지에게 돌려주기. 대지를 대지에게 돌려주어 사람들이 얻은 이득은 건축물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통행이다. 고대 신전이나 궁궐에 쓰였고 특정한 건축 철학을 지닌 건축주나 지을 법한 필로티 건축물을 어느 외국 도시에서도 이 땅에서만큼 많이 본 일은 없다. 만약 미래의 누군가 20세기와 21세기가 교차하는 지금의 한국건축사를 쓴다면 아마 필로티 건축물을 빼놓지는 못할 것이라 감히 말할 정도로 많다는 것. 더구나 공공을 위한 건축물뿐 아니라 거주를 위한 주택에까지 두루 나타난다는 것은 일종의 경이로움을 부른다. 모든 일의 발단은 자가용 승용차의 보급 탓이리라 짐작한다.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1990년대 이 땅의 대부분 가정이 자가용을 가지게 되면서 주차난이 심각해졌다. 그때 정부는 주차장 확보를 강제했고 건축업자의 이익과 부합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필로티 건축물이다.

뜬금없이 즐비한 이 땅의 필로티에서 누더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누더기를 가리키는 한자말 남루를 먼저 되뇌어 본다. 제대로 된 옷 한 벌이 없어 자투리 천을 모아 기울 수밖에 없는 처량한 형편이 떠오른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한 이들을 흘기며 뱉은 마르크스의 말, 룸펜프롤레타리아의 룸펜도 본디 누더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겉은 말끔해졌지만 속은 오히려 누더기가 된 형편을 생각하면서 누더기가 꼭 부끄럽기만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빈을 주장한 동서양의 종교인들에서 두루 보듯,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 옷이 꼭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어떤 종교는 아예 누더기를 제도로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불교의 법복인 ‘납의’ 같은 것이다. 납의는 본디 사람들이 버린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옷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저 버린 헝겊도 아니고 주검을 화장하고 남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납의에는 현세의 덧없음, 바니타스의 뜻이 담겼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납의는 누비로 이름을 바꾼다.이름이 바뀐 것은 우선 꾸밈새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세의 덧없음을 보여주던 헝겊 조각은 화려한 비단 조각으로 바뀌었고 그것도 모자라 멀쩡한 천을 일부러 찢어서 다시 잇는 일도 생겼다. 천의무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솔기를 감추는 일은 더는 자랑이 아니고 도리어 드러내는 것이 자랑이 되었다.

누더기와 누비의 공통점과 차이에서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 비평가 매클루언의 개념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 그는 ‘마셜 매클루언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마플리트 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적이 있다. 이틀에 걸친 강연의 첫날 주제는 ‘경계선 위에 선 캐나다’였다.

매클루언은 경계선이란 말을 본디 정신분석의 ‘경계 사례’ 개념뿐 아니라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캐나다의 형편을 가리키는 이중적 의미로 썼다. 경계 사례는 신경증과 분열증의 경계에 해당되는 정신장애를 말하는데 위대한 예술가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성향을 가리킬 때 쓰기도 한다. 개념을 더듬다가 새로 읽어본 강연문에서 지금 우리 형편과 매클루언이 역설한 것이 얼마나 닮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매클루언이 일러준 경계 사례는 본래 우리의 삶이 늘 경계선 위에 있고, 아슬아슬한 경계선은 특정 세계 내에서는 결코 불가능하지만 접하고 있는 세계들 사이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모든 구성원의 발전을 가져다주는 창조적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면 정신병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창조적인 힘이 되리라는 말이다.

필로티에서 촉발되긴 했지만 이 나라 안팎을 둘러보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등등 첨예한 갈등에 둘러싸인 우리 형편이 어쩌면 전 세계를 위해 예술가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누더기가 누비 되는 날, 해월의 말을 따르자면 만국 병마가 몰려왔다가 길바닥에 비단이 깔리는 날이 오리라는 말을 다시 음미하면서 말이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