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를수록 또렷해지는 인상이 있다. 칠흑 어둠 속 한 줄기 불빛처럼. 나에겐 2년 전 가을, 여행 담당 기자 시절 취재차 들른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앞에서 느꼈던 소백산맥의 ‘시원한 눈맛’이 그러하다. 뇌리의 한 구석을 점령한 그 인상은 힘들고 외로울 때면 그리움으로 변해 마음의 정수리로 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소백산맥과의 인연은 살아생전 최고의 문화재 감식가로 명성을 떨쳤던 최순우(1919~1984) 선생 덕분이다. 그는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하다”며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눈맛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이라고 칭송했다.

지난 9일 새벽, 추억 어린 부석사를 다시 찾았다. 새해 첫날, 부석사의 창건 이념에 기대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간의 극한 대립이 낳은 한반도 전쟁 위기의 해법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북핵과 부석사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의아해하겠지만, 둘은 ‘반전평화’라는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다. 그 공통분모를 추출하려면 부석사가 지어진 6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봉(당나라 고종 연호) 원년(676년) 의상은 태백산에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大乘·큰 가르침)을 폈더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삼국유사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의상대사가 신라 조정의 명에 따라 현재 부석사 자리인 영주 태백산(봉황산) 자락에 절을 지어 화엄불교를 포교했다는 뜻이다. 676년은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해다.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망시켰지만, 외세를 끌어들인 죄로 당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장장 16년 간 전란이 지속된 셈이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반발로 혼란은 극심했다.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화엄종찰 부석사의 창건 배경이다.

그런데 부석사를 왜 영주 태백산 자락에 지은 걸까. 삼국유사를 비롯한 관련 역사 기록들은 너무 소략해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답은 현장에 있다. 그것도 무량수전 앞에 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린다. 이런 생각을 하며 되밟아간 부석사 새벽 탐방길은 가슴 두근거렸다. 비탈진 산기슭에 쌓은 세 개의 대석단 중앙에 줄지어 들어선 천왕문과 범종루, 안양루를 지날 때마다 북미 갈등처럼 완강하게 버티고 선 어둠은 시나브로 걷혀갔다.

영생을 뜻하는 ‘무량수’전에 이르렀을 땐 먼동이 희붐하게 터왔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서니 저 멀리 아스라이 하늘과 맞닿은 소백산맥이 붉은 서광을 내뿜으며 물결치듯 시야에 다가왔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동무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서서 평등세상을 펼쳐내고 있었다. 무량수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란 저런 곳일 듯했다.

의상대사는 그런 뜻으로 소백산맥이 가장 잘 보이는 영주 태백산 자락에 부석사를 세운 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의 경계를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가 여수에까지 이르는 소백산맥은 신라·백제·고구려 영토를 하나로 아우르는 셈이니, 다시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가자는 ‘반전평화’ 염원을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다’. 그 뜻은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요지를 시로 축약한 ‘화엄일승법계도’ 구절에서도 읽힌다. 대립과 반목에서 벗어난 ‘통합의 철학’을 설파한 것이다.

부석사 창건 이념을 북핵 문제 해결의 정신적 자산으로 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을 하더라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쪽에서 죽지 이쪽(미국 본토)에서 죽지 않는다.”(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주체 조선의 핵을 온 세상이 똑똑히 볼 때가 됐다.”(북한) “(오는 3월) 한미 연합훈련 시기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중국 군부)

한반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그럴수록 ‘반전평화’ 염원 또한 간절해진다. 무기를 내려놓은, 조건 없는 대화만이 모두를 살릴 수 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유엔 창설의 철학적 기초가 된 명저 ‘영구평화론’에서 역설했다. “섬멸전에서는 쌍방이 동시에 멸망하고, 모든 정의도 멸망당하기 때문에 영구평화는 인류의 거대한 묘지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다”고.

위기는 곧 기회다. 유엔도 평창올림픽 때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결의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았는가. 조속한 대화 재개를 당당히 주장하자. 더 늦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