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의 세종대왕릉을 거쳐 남양주의 ‘다산유적지’를 찾아간다. 조선을 대표하는 문도의 길을 걸었던 정약용의 도(韜, 활집·칼집)에는 칼·활 대신 붓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양수대교를 지나 마현마을 마재성지로 들어선다. 다산이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그리워한 곳이고, 천주교 박해로 희생된 인물들(정약종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이 인연을 맺은 곳이다.
마을을 돌아 나와 내려가니 ‘정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이다. 유적지 안쪽의 문화관과 전시관 그리고 사당과 복원된 생가 및 묘소를 둘러보고, 맞은편의 실학박물관을 거쳐 ‘다산생태공원’에 들어선다. 호수에 면해 ‘수월정’이 서 있고, 그 곁에 노래비가 누워 있다. 쇠잔해져 가는 국운을, 고난 속 득의의 저술이 쓸모없어져 가는 것을, 그래서 허랑한 마음을, 달이 내려앉은 저 물에 떠내려 보냈을까. 다산의 생애와 저술이 적힌 팻말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음미해 본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산이 일곱 살 때 지은 시다. 원근법을 깨친 시라기보다는, 다산이 살았던 조선의 모습이나 앞으로 닥칠 자신의 삶의 유비로 읽힌다. 조선후기 사회는 ‘사리사욕’의 붕당정치로 국리민복이나 부국강병 같은 ‘대의’는 찾아볼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 나라를 떠받칠 인재가 설 곳이 있었겠는가. ‘큰 산’이 ‘작은 산’에 가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큰 산은 크기에 값하는 일을 한다. 다산은 조선의 현실을 면밀히 탐색하고, 조선을 지배하는 이념을 정밀하게 검토하며,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의 경전과 법전 및 역사와 제도를 샅샅이 훑어 올라간다.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계보학을 선취한다.
현실의 면밀한 탐색은 아버지 정재원의 지방 수령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에서 시작되어, 출사하여 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며 경험한 것을 거쳐, 유배지에서 접한 민생의 바닥까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그 결과는 중앙의 불합리한 제도와 기구, 지방 수령의 탐학 및 나태와 아전의 농간에 따른 ‘민생의 도탄’이다. ‘기민시’나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에 지적된 문제점과 제시된 해결책은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망라할 정도로 치밀하고 광범위하다.
이념의 정밀한 검토는 주로 성리학 주자학 비판에 집중된다. 송나라의 주희는 위진과 수당을 풍미했던 불교의 형이상학을 능가하려다가, 공맹의 유학을 지나치게 관념화하여, 권력의 지배이론으로, 개인의 수양론으로 후퇴시킴으로써 ‘치민(治民)’이나 ‘경세(經世)’의 효용성을 상실케 한다. 이는 같은 시기 송에서 도학이 수기(修己)에만 치중하고 치인 또는 경세를 등한시한다는 사공학파의 비판에서 예정된 것이다. 왜 정약용의 저술명이 ‘경세’유표이겠는가.
구체적인 방안을 찾기 위해서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의 경학도 지배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왕권을 천명에 결부시키고, 재난이나 이변을 왕권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경고로 수용하는 수준에 머문다. 거기에는 지배자의 강령은 있을지언정 경세나 ‘목민’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동중서가 유학의 경전에서 뽑아낸 이론이 이 정도이니, 공맹의 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은 아니고, 통치자나 지배계급에게 도덕이나 윤리를 주문하는 수준에 머문다. 흔히 듣는 왕도정치가 그것이 아닌가.
그래서 더 거슬러 ‘요·순·우·직·설·익·고요’의 무리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방법이 보인다. 경세유표에 들어 있는 ‘전론’ ‘정전론’ ‘정전의’ 등의 토지개혁론이 그 일환이다. 아랫물이 탁하면 원천으로 올라가야 한다. 원천은 새 물이 솟아나오는 곳이다. 문학에서 서구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자문화권에서 ‘시경’에까지 올라가듯이. 원천은 멀어서 구체적인 것이 사상되어 보일 뿐이다. 새로운 구체성을 위해 그것은 ‘오래된 미래’가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시작’이 바로 그러한 지점일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자신들만의 부귀의 지속적인 향유를 위해 우주 만물 배후에 변하지 않는 ‘이(理 )’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역·역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보고 여섯 차례나 해석하여 보완한 다산에게, 이는 존재가 아니라 ‘기(氣)’가 자기 운동을 하며 드러내는 속성이고 법칙이며 관념일 뿐이다. 우주 만물은 생성과 분화를 거듭하며 변전해간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추동해내지 못하는 세력이 기득권을 고수하며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할 때, 시대를 혁신하려는 노력은 무산되고, 민생도 국가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산은 묵묵히 가리키고 있다.
도보여행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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