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막바지, 초등 저학년 아이들과 새 달력을 만들기로 했다. 아이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다음 자를 대서 칸을 만들고 숫자를 써넣어서 만드는 달력. 어린이 전문서점 ‘책과 아이들’ 참새반 벽에 붙여놓고 1년 내내 볼 달력이다. 우선 달력에 들어갈 시부터 쓰기로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붙어있던 달력의 시를 보면서 아이들은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솔직하고 재미있는 시인데도 아이들은 보통이라고 했다. 오히려 글씨가 나쁘다느니 그림을 못 그렸다느니 하면서 킥킥 웃었다. 그랬으니 새 달력에 들어갈 시를 쓰는 아이들의 고민이 평소보다 깊다. 자기 시에 내려질 평가의 무게가 미리 짐작되는 모양이다. ‘무엇을 쓸까?’에서부터 막혀 한참 동안 끙끙거린다.

“선생님. 쓸 게 없어요.” “너, 오자마자 다친 얘기 했잖아.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 쓰면 좋겠지.”

“선생님. 감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안 나요.” “계속 기침 나서 진짜 힘들겠다. 감기 때문에 힘든 거 쓸까?”

“아! 선생님. 나는 진짜 쓸 게 하나도 생각 안 나요.” “그렇게 떠드는데 어떻게 생각이 나냐? 입을 다물어야 생각이 나지.”

모두 글감을 잡고 나자 고요해진다. 연필심 사각거리는 소리만 나지막이 들린다. 아이들이 자기 생각에 빠져들어 있으니 평화로운 기운이 싸락눈처럼 싸락싸락 쌓이는 것 같다. 덕분에 나도 가만가만 글감을 떠올려 본다.

“선생님! 다 했어요.” “응? 벌써?”

평화로운 기운은 순식간에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가 떠올렸던 글감은 흔적조차 없다. 뭘 쓸지 오래 고민한 녀석일수록 일필휘지로 해치우고는 공책을 들고 온다. 척! 공책을 내미는 손길에 자신감이 넘친다.

시에는 깊은 생각 같은 건 담겨 있지도 않고 애초에 담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냥 짧고 간단하다. 그런데 재미있다. 더 생각해보라는 잔소리를 하고 싶어도 입댈 데가 없다. 할 수 없이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내주며 먼저 옮겨 쓰고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도 공책을 들고 온다. 나름대로는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한 명 한 명 더 생각해볼 것과 더 다듬어볼 것을 이야기한다. 다른 때와는 달리 귀찮아하지 않고 공책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자기 시를 매만진다. 마침내 모두 시를 완성한다.

이제 시 쓰기보다 어려운 일이 남았다. 누가 몇 월 달력을 만들 건지 정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 생일이 들어있는 달을 고르고 싶어 한다. 열둘이나 되는 달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자신이 태어난 달이다.

“나는 3월 할래요.” “나도 3월 하고 싶어요. 3월 하면 안 돼요?”

같은 달에 태어난 아이들은 해마다 꼭 있고, 몇 년째 그 문제에 부딪혀 왔던 나는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이긴 친구는 그달하고, 진 친구는 다른 친구가 안 한 달 하자.”

가위바위보 결전을 치를 아이들 눈에서 빛이 난다. 시를 쓸 때보다 더 치열한 눈빛이다.

“가위바위보!” 아이들이 목청껏 소리 지르며 등 뒤에 숨겼던 무기를 내민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가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바위, 상대방을 꼼짝없이 덮어씌울 보자기.

가위바위보를 몇 번 더 외친 후에야 승패가 결정 난다. 자기 생일이 들어있는 달을 선택하게 된 아이는 얼굴 가득 웃음을 흘리며 당당하게 종이와 자를 받아간다. 진 아이도 곧 패배감을 털어내고 다른 달을 선택한다. 주로 엄마 생일이 있는 달이 선택된다.

2018년 달력을 만들 때는 전에 없던 일이 있었다. 달력을 만들 아이가 좀 많았다. 화요일과 수요일에 오는 아이들만으로는 부족하고 토요일에 오는 아이들까지 하기엔 넘치고. 어떻게 할까 하다가 시도 써보게 할 겸, 모두 달력을 만들게 했다. 그러자 열여섯 장의 달력이 만들어졌다. 1월이 두 장, 5월이 두 장, 11월이 두 장, 12월이 두 장이다. 2018년이 123일이 늘어났다. 시만 쓴 아이가 있어서 그나마 한 달이 줄었다. 열여섯 장의 달력과 시 한 편을 벽에 붙여놓고 보니 마음이 더없이 흐뭇하다. 지난해 병원 신세 지느라, 또 어른들이 병원 계셔서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기분이다. 부자도 이런 부자가 없다. 절로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열여섯 달 488일을 가진 기분으로 올해 무술년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다.

열일곱 편의 시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시는 3학년 재훈이가 쓴 ‘떠들기’였다. 2018년, 모두 움츠러들지 말고 재훈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길 바라며 시를 나눈다.

떠들기 // 박재훈

시를 쓰면서 떠들고/ 책을 읽어도 떠들고/ 공부를 해도 떠들고/ 자꾸 떠든다// 계속 떠들어도/ 입이 안 아프다// 내 입은 공장처럼 쉬지 않는다/ 조용한 입은/ 내 입이 아니다 (*)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