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과 제재 힘겨룸은 모두에게 피로감 느낄 수밖에 없지만 새해 예상보다 빠른 남북 해빙무드에 어리둥절. 북한 올림픽 참가는 걸어 잠근 대문의 빗장 푸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하지만 올림픽 후 날아올 북한의 청구서는 난감한 요구가 아닐까. 남북대화 지금이 기회겠지만 가속페달 밟아댈 것도 브레이크에 자주 발을 갖다 댈 일도 아니다.

복된 민주주의를 키워 그 속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 민족의 슬기를 세계만방에 빛내고 싶다. 하지만 위정자를 시류에 급급하게 만들고, 전 국민의 삶을 시들하게 하고, 타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분단의 공포와 불안은 여전하다. 이 아담한 강토가 행복해지기를 소망한 꿈이 올해는 이뤄질 수 있을까. 민족의 전 역량과 정열을 결집할 일이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나 역시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TV로 유심히 지켜봤다. 비교적 자유롭게 질문과 답변이 오간 올해 회견에선 여러 주제가 화두에 올랐다. 개헌에다 일자리 늘리기, 신산업 육성, 서민 생계 보호 등등. 중요하지 않은 게 무엇 하나 있을까만 내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남북문제였다.

그 전날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의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이 합의됐던 터라 대통령의 청사진이 궁금했다. 새해 들어 김정은이 보인 유화 제스처로 촉발된 남북 해빙 무드가 예상보다 빠르게 확산돼 국민 모두 약간 어리둥절한 참이 아닌가. 한 달 후면 500명이나 되는 북한 대표단이 평창에 찾아올 거다. 입장식에서 남북한의 남녀 기수가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장면도 전 세계에 중계될 터다. 국내외 언론들도 스탠드에 줄지어 앉아 화사한 표정으로 ‘짝짝이’를 두드리는 북한응원단에 경쟁적으로 카메라를 갖다 댈 거다.

북한의 참가는 올림픽 흥행에 도움이 되긴 하겠다. 초대형 이벤트에 익숙해져 조금은 시들해진 올림픽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잡아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근본 해결책이라고 믿는 국민은 드물다. 요란했던 스포츠 이벤트 후에도 남북 관계가 부침을 거듭했던 걸 봐 왔으니. 그저 이번 합의가 걸어 잠근 대문의 빗장을 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것뿐이다. 문 대통령도 사뭇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가 근본 목표가 돼야 하며, ‘제재와 압박’이라는 국제사회의 기조에서 섣불리 벗어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일정한 성과가 담보돼야 추진할 것이라고도 했다.

남북관계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난해 나는 2018년엔 북핵 문제가 대화의 테이블에 오르지 않을까 추측한 적이 있다. 별다른 근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미국이나 북한이나 카드를 다 써먹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보유국’ 인정을 받으려고 지난해에만 15차례나 도발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본 척도 않으니 내심 초조했을 게다. 새해 들어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도발해 봐야 미국과 서방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제재와 압박의 강도를 높여 왔지만 북한이 두 손 들 확률이 거의 없다는 데 고민이 있다. 선제 타격도 사실상 불가능한 엄포인 건 말할 나위가 없고.

그러니, 새해 들어서도 도발과 제재란 ‘도토리 키 재기’식 힘겨룸이 계속된다면 양쪽 모두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주먹을 을러대는 ‘치킨게임’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다는 건 미국도 북한도 알고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성동격서(聲東擊西)라 할까, 남한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방식으로 2라운드를 시작한 거다. 올림픽 참가를 고리로 한 북한의 평화 공세가 속으로 은근히 반가운 건 미국도 마찬가지 아닐까. 도끼 든 놈이 바늘 든 놈을 못 이기더라고 ‘돌콩’ 같이 튀는 북한을 제압하기엔 미국도 벅찬 거다. 미국이 북한과 협상 테이블을 차리려는 조짐은 사실 지난해부터 나타났다. 일단 철회하긴 했지만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조건 없이 만날 수도 있다”던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다. 바로 그 며칠 전 미국과 북한이 베이징에서 극비 접촉을 한 끝에 나온 발언인 거다.

그렇다고 그동안 해왔던 깐이 있는데 곧바로 북한과 마주 앉을 터수는 못 된다. 한국이 먼저 북한과 판을 벌여보겠다니 일단 지켜보자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모양이다. 트럼프가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남북대화를 100% 지지한다”거나, 미국 언론에 “김정은과 전화 통화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하지만 문 대통령에게 백지수표가 아닌 ‘조건부 어음’을 건넨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문 대통령이 고민하는 지점도 거기일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면 북한의 청구서가 날아올 거다. “우리가 올림픽에 재 뿌리지 않고 도와줬으니 당신네도 뭐 성의를 보일 차례가 아니냐.”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청구서의 맨 앞에 올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건 유엔의 대북제재 항목에 들어 있는 것이니 우리로선 난감한 요구다. 우리 정부는 경제 지원과 ‘한반도 비핵화’ 카드를 연계해 협상하려 들겠지만 북한이 펄쩍 뛸 공산이 높다. “핵 문제는 남조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그건 미국한테 써먹을 카드야”하고 면박이나 줄 거다. 끝내 요구를 안 들어주면 “우린 성의를 보였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냐”고 다시 판을 깰 거고.

미국이라고 팔짱 끼고 있지는 않겠지. 더그아웃에 버티고 선 야구 감독처럼 한국팀의 플레이를 감시하면서 번트를 해라, 히트앤드런을 해라 온갖 사인을 낼 거다. 여차하면 “올림픽 잘 치르라고 협상을 용인한 거지 언제 너희 멋대로 북한에 제재를 풀라고 했느냐”고 ‘서스펜디드 게임’을 선언할 거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로부터 운전대를 완전히 넘겨받은 게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색된 남북 관계를 풀긴 해야 하는데, 눈을 부릅뜬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대통령의 고심이 이번 기자회견의 발언 하나하나에서 읽혔다.

그렇다고 대통령이나 정부가 미리부터 ‘알아서 길’ 일도 아닐 것이다. 우리 민족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 대화가 절실하다면 문 정부 하기에 따라 지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속 페달을 밟아댈 것도 아니지만 브레이크에 너무 자주 발을 갖다 댈 일도 아니다. 전후방을 잘 살피더라도 옆 차를 흘끗거리며 너무 멈칫거릴 것도 없다. 북한이 손을 벌리는 대로 덥석 쥐여줘서도 곤란하지만 너무 야박하게 굴면 판이 깨져 버린다. 미국을 설득해가며 인도주의적 지원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터.

내 생각엔 문 정부가 지금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는 올림픽 이후에도 북한과의 대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속 썩는 일이 있어도 좀 참아가면서, 미국과 북한이 테이블에 마주 앉을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다. 적절한 시점에 미국에 바통을 넘겨주면 된다. 과욕도 금물이고, 좌고우면도 안 된다. 문제는 ‘방향과 속도’임을 명심할 일이다. 야당과 보수 진영도 문재인 정부의 대북 협상을 감시하고 때로는 비판도 할 수 있겠지만 판 자체를 흔들어 깨려고 하지는 말라.

사족 한마디. 남북회담이 열리던 날 나는 오래된 신문기사 하나를 찾아 읽었다. 1961년 1월 1일 자 국제신문, 당시 주필이던 소설가 이병주가 쓴 신년사설이다.

‘…국토 분단의 비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국면에서 더욱 심각하다. 위정자가 국가 백년지대계를 망각하고 시류에 급급하고 보신에 철저한 이유는 국토분단으로 인한 자기도 모르는 불안 때문에 그렇다. 이 불안은 전 국민의 생활을 침해하고 있다. 경제적으론 두말할 나위 없고 문화 교육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생신(生新)하고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시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안은 또 타국에의 의존도를 농후하게 함으로써 이중의 화(禍)를 마련한다. 결언해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몸부림쳐야 할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남쪽의 청년들을 백두산에서 등산시키고 싶다. 신의주의 학생들을 부산의 항구에서 맞이하고 싶다. (…)이 아담한 강토가 하나의 판도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처럼 복된 민주주의를 키워 그 속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 민족의 슬기를 세계만방에 빛내고 싶다. 통일을 위해서 민족의 전 역량을 결집하자! 이 비원 성취를 위해서 민족의 정열을 결집하자!’

이병주는 이 사설 때문에 5·16 후 투옥돼 2년 7개월을 복역했다. 하고 보면, 지금도 변한 건 하나 없지 않은가. 위정자를 시류에 급급하게 만들고, 전 국민의 삶을 시들게 하고, 타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분단의 공포와 불안은 여전하다. 이 아담한 강토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처럼 행복해지기를 소망한 그의 꿈이 올해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가 57년 전 외쳤던 대로 민족의 전 역량과 정열을 결집할 일이다. 사자와 같은 용기, 여우와 같은 지혜를 보태 가면서.

소설가·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