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느낌은 다르지 않다.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펴 밥 짓고 외양간의 소에게 줄 여물 쑬 아침저녁엔 방안이 곧 찜질방으로 변한다.
그래서 겨울은 밖에 나온 사람들 보기 힘들다.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머무는 날엔 자꾸 마음도 방안에 가둬두는 것이 세월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이다. 방안의 온기를 지키는 것은 아랫목에 깔린 이불이 한몫 하고, 시린 손발을 녹이는 가족의 모임 장소가 된다. 그러나 간밤에 눈이 내렸거나, 집 앞의 논에 얼음 꽁꽁 얼 정도로 추운 날엔 사정은 달라지고 그 곳에 나는 없다.
귀신같이 알아차린 눈 내린 이른 아침, 마당과 뒤뜰 장독에 소복이 쌓인 눈은 동네 또래 아이들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불러낸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사정을 미리 알아차리셨는지 간밤에 어머니는 초롱불 밑에서 구멍 난 양말을 밤새 기우셨다. 떨어진 양말의 조각을 잘라 덧대어 기워 놓은 두꺼워진 양말 탓에 내둥 신었던 신발이 발에 꼬옥 끼인다. 순간 작게 느껴지는 검정 고무신에 발을 밀어 넣고 밖으로 뛰어 나간다. 이미 동네 아이들은 눈 위에서 노느라고 정신이 없다. 밤새 내린 하얀 눈은 집 앞의 파릇하게 자라고 있는 보리밭도 덮어 세상을 온통 아이들 놀이터로 만들어 놓았다.
하얀 양탄자로 만들어진 거대한 운동장의 아이들은 술래잡기에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논으로 뛰면 덜 자른 볏짚 밑동에 걸려 엎어지지만 아프지 않다. 밭으로 내달리다 고랑에 걸려 넘어져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세상은 온통 하얀 천국이었다. 눈뿐만이 아니다. 물로 채워진 논엔 얼음이 언다. 날씨가 어중간하거나 눈이 많은 날엔 살얼음으로 질퍽이지만, 매섭게 추운 날엔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빙판이 된다. 그래서 따듯한 아랫목을 벗어날 수 있는 꼬임에 넘어가기 일쑤다.
칼날처럼 예리한 차가운 바람은 허름하게 걸쳐 입은 옷 속으로 비집고 들며, 무방비 상태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그렇지만 이미 신나는 놀이터로 변한 빙판에서 우릴 끌어내긴 역부족이다. 썰매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허기도 잊은 채 놀이에 열중이다. 밥 먹으라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늘 그런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확신은 없지만 밤새 논의 물이 얼기를 학수고대하며 잠에 든다.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일찍 눈을 뜨자마자 썰매를 어깨에 들쳐 메고 논으로 달려간다. 꽁꽁 얼어주길 기대 했던 얼음판은 춥지 않은 날씨 탓의 살얼음에 옷만 적시고 만다. 이렇게 실망스러운 날도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르쳐주지도 않은 삼한사온의 겨울철 날씨 특징을 일찍이 깨닫는다.
이른 아침 기분 좋게 나갔던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오는 모습을 부모님은 굳이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다 알아챈 듯하다. 이렇게 허탕 친 날엔 왠지 발이 더 시리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아버지께서 방금 담아다 놓았을 법한 화롯불에 몸을 녹인다. 썰매도 못 탔는데 양말은 물에 빠져 젖어있었고 발은 따뜻한 화롯불에 욱신거린다. 이윽고 아침 밥상이 방으로 들어오고, 배는 고팠지만 밥 먹는 내내 내 마음은 날씨에 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겨울엔 얼음이 얼어 빙판을 만들어 즐거움을 주었던 산골마을 우리 집 앞에 펼쳐진 하얀 천국을 잊을 수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2월 9일부터 17일간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시간에 쫓기듯 매끄럽지 않았던 남북 단일팀 구성이 정치적 리그전으로 오해받기 딱 이다. 땀으로 대회를 준비한 선수에게 불어온 것은 격려가 아닌 겨울바람이었다. 파고드는 외풍을 막아 선수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설산만 바라보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눈과 얼음에서 벌어지는 겨울 스포츠 향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칠 스포츠 대전에 그들이 만들 현란한 기량을 기대하며, 깊이 숨어있는 겨울철 내 동심도 밖으로 나와, 함께 어울렸으면 좋겠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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