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오픈테니스대회에 출전한 정현 선수의 선전에 즐거워했던 이가 어디 나뿐일까. 꺼멓게 탄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모습, 부모님께 큰절하는 장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유머를 섞어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 당당하고 유쾌한 스물두 살의 그를 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지금 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숱한 20대들 생각에.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는 요즘 애들이 취업 걱정에 기를 펴지 못하는 걸 지켜보자면 가슴이 무지근하다. 오늘의 20대는 제 길을 개척하느라 지금도 분투하고 있다. 그들의 눈물과 땀엔 칭찬과 보상이 따라야 하지만 진짜 행복한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노력으로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밀양 화재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지난 한 주를 보너스 탄 기분으로 보냈다. 호주오픈테니스대회에 출전한 정현 선수의 선전 때문이다. 멜버른에서 느닷없이(?) 날아든 낭보에 즐거워했던 이가 어디 나뿐일까. 평소 테니스에 그다지 관심이 컸던 것도 아니면서 그의 승전보를 되풀이 찾아 읽기도 했고 TV 중계를 지켜보기도 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반가웠던 건 말할 나위도 없지만 내가 특히 신기하게 여겼던 건 테니스란 종목의 특성 때문이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간혹 라파엘 나달이나 노바크 조코비치, 로저 페더러 같은 세계적 선수의 경기에 시선이 머무르는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현란한 플레이에 감탄했으면서도 우리 선수를 그 자리에 놓아두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없었던 성싶다. 큰 키에 강인한 체력, 경쾌한 풋워크가 필수적인 테니스는 애초부터 서양인을 위한 것이지 우리네 종목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개화기 고종 황제께서 외국 선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는 걸 보시고는 혀를 끌끌 찼다던가. “허, 저 힘든 짓은 하인에게나 시키지 왜 저러고 있는가.”

그런데, 정현 선수를 보면서 나는 고정관념을 깨야 할 처지에 맞닥뜨리게 됐던 것. 물론 유쾌한 경험이었다. 비록 발바닥 부상 때문에 기권했지만 ‘테니스 황제’ 페더러와 결승 진출을 놓고 열전을 벌인 것만으로도 신통하고 대견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세계 랭킹 4위인 알렉산더 즈베레프를 꺾었고, 호주오픈에서만 6차례 우승하고 4대 메이저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테니스의 전설’ 조코비치도 격파했던 터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 것은 정작 그의 도전이 끝난 다음이었다. 비록 기량 차는 좀 났지만 패더러와 선전을 벌이던 그가 2세트에서 기권했을 때 다들 아쉬워했던 터다. 하지만 물집이 터져 벌건 속살이 드러난 그의 발바닥을 보고는 기권을 수긍했다. 발바닥이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를 펼쳤던 그의 분투는 우리를 새삼 감동하게 만들었던 거다.

나를 포함한 국민들을 열광시킨 것은 또 있었다. 경기 후 꺼멓게 탄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던 모습, 부모님께 큰절하는 장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위트를 섞어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 그는 당당하고 유쾌한 젊은이였다. 그때도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우리는 자식들이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세계인으로 만들려고 지난 한 세대를 분투해 오지 않았던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애썼고, 극성스럽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식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터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온 국민이 환호했던 걸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난한 나라의 첫 올림픽 금메달은 그만큼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난 지금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올림픽에서 도합 백여 개의 금메달은 물론이고, 월드컵 4강의 기쁨도 맛보았다.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의 김연아처럼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종목에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아이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부모 세대로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다.

그런데, 문득 우리네 현실로 눈을 돌리면 정현 선수가 준 기쁨이 사그라드는 느낌에 당혹스러워진다. 지금 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숱한 20대들은 어떤가.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이제 졸업을 앞두었는데도 아직 마땅한 취직자리가 나서지 않은 내 아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얼마 전 집에 다니러 왔다가 서울의 원룸 자취방으로 되돌아가는 아들에게 나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찾아 보아라”고 타일렀지만 대문을 나서는 풀 죽은 뒷모습에 가슴이 무지근해졌다.

청년취업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좀체 풀릴 기미가 없는 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애써 번 돈의 많은 몫을 교육에 쏟아부었던 우리네가 아니었던가. 조기 유학을 시키려고 ‘기러기 가족’을 자청한 사람도 적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는 요즘 애들이 취업 걱정에 기를 펴지 못하는 걸 지켜보자면 그게 우리 세대의 원죄(?)가 아닌가 싶어진다.

‘N포 세대’, ‘알바 인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무겁다. 다락같이 오르는 집값에 기껏 비정규직 밖에 차례가 오지 않고, 길어지는 생애 주기에도 그나마 갈수록 짧아지는 정년 때문에 결혼조차 주저하는 아이들이 아닌가. 글쎄, ‘비트코인’이니 뭐니 하는 건 아무리 뜯어봐도 경상도 방언으로 ‘꼬시래기 제 살 뜯기’랄까, ‘흙수저’끼리 돈을 타 넣어 재수 좋은 몇 명에게 몰아주는 짓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필수적이라니 뭐니 해 가면서, 수수료 따위를 꼬박꼬박 챙기는 영악한 세력에게만 좋은 일을 시키지 않나. 그런데도 “당신네는 주식,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으면서 우리더러는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항변하는 그들에게 “그런 야바위판에 끼지 말라”고 준엄하게(?) 나무라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자화상에 자괴감이 느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청년실업 해소에 나름대로 정책적 노력을 펴고는 있는 것 같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정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긴 하다. 대기업을 포함한 사회 전 영역이 물적·제도적 인프라를 차근차근 깔아가야 할 일이 아닌가. 정부가 청년 실업 문제를 푼답시고 귀한 세금을 행여 엉뚱한 구멍에 쏟아 넣고 있지 않은지도 감시해야겠고.

여담인데 올드 테니스 팬이라면 기억할 이름이겠지만, 80년대 초에 뛰었던 전창대, 전영대 선수가 내 고교 동기동창이다. 40여 년 전 고교 시절 나는 그 친구들이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연습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본 적이 있다. 그들은 서비스 에어리어 맨 구석에 작은 깡통을 세워두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반대편 라인 밖에서 그걸 맞히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구석을 찌르는 서비스 기술을 터득하려는 것이었으리라. 정현 선수의 울근불근 튀어나온 허벅지 근육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저 아이도 저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좌절의 시간을 거쳤을까. 정현 선수만 그랬겠는가. 하늘을 박차고 오른 김연아의 트리플엑셀 뒤엔 수천, 수만 번의 엉덩방아가 있었을 테고, TV광고 마따나 이상화의 금메달은 그가 흘린 땀 13t의 결실이 아니었겠나. 어른들의 기우를 무색게 하듯 오늘의 20대는 제 길을 개척하느라 지금도 분투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행복은 분투하는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그들의 눈물과 땀은 칭찬받아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하지만 진짜 정의로운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노력으로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어차피 세상은 정현과 김연아 같은 아이들로만 구성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정현의 도전은 4강에서 끝났지만 결과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아름다운 청년’임을 입증했다. 이제 스물두 살인 그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열흘쯤 후면 평창겨울올림픽이 열린다. 젊은 영웅들이 쏟아져 나올 테고 우리는 그들이 펼치는 벅찬 드라마에 열광하겠지. 그런데 사족 한 마디. 우리들이 좀 더 어른다워지면 좋겠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시간에 쫓긴 정부의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걸 증폭해 ‘남남 갈등’을 유발하려는 일부 정파나 세력은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좀 자제하면 좋겠다. 일부 언론도 마찬가지. 현송월이 방남하자 중계차까지 동원해 뭘 먹고 어디서 잤느냐 따위 일거수일투족을 자기네가 시시콜콜 보도해 놓고선 “땀 흘리는 선수보다 현송월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비판해서 어쩌자는 건지. ‘평창’의 ‘평’자를 따와 ‘평양올림픽’이라고 비아냥하면서 기발한 ‘펀(pun)’이라도 개발했다는 듯 의기양양해 하는 꼴이 볼썽사납다. 아이들 보기 민망하니 내남없이 좀 어른답게 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