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위양못을 찾았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구름으로 천지간이 어룽지는 오월도 아니고 오색 단풍이 연못에 비치는 가을도 아니어서 풍경은 서늘했다. 가장자리부터 꽝꽝 언 얼음은 못 중앙 일부만을 비워둔 채 빙판을 만들고 있다. 얼음 위를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살짝 들었는데, 막 도착한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의 남자 몇이 왁자하게 떠들더니 주변에서 제법 큰 돌멩이들을 주워서 못 위에 던진다. 돌멩이들은 쨍 소리를 내며 빙판 위로 미끄러진다. 남자들이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들은 수십 년 전 얼음 언 논에서 썰매를 타던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나갔다. 밀양 부북면 위양리 294번지에 있는 위양못은 신라시대에 축조된 저수지인데 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완재정(宛在亭)이란 소담한 정자가 있다. 완재정에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번에 보니 말끔하게 화강암으로 홍교를 만들어놓았다. 낯설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오래된 다리를 보며 보수가 필요하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주위 경관과의 어우러짐은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미적 감수성 부재의 행정을 보면 한숨이 난다.
완재정의 작은 마루에 걸터앉아 빙판으로 변한 위양못을 바라본다. 겨울의 조용한 햇살이 빙판 위에 무심히 흩어진다.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린 듯하여 담장 중간에 나 있는 쪽문으로 나가 본다. 새라면 꽤 큰 놈일 것 같은데, 혹시나 얼음에 갇힌 새라도 있나 싶어 사방을 둘러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얼음판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온 신경을 모아 집중을 하는데 조용히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이거, 얼음이 힘쓰는 소리예요” 한다.
“에? 얼음이 힘을 쓴다니요?”
“사실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지요. 물과 얼음이 닿는 부분이 있잖아요? 거기서부터 갈라지는 소리가 공명이 돼서 크게 울리는 거지요. 우리 어릴 때 저수지에서 한참 썰매를 타다 보면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얼음이 깨지는 소린데 겁도 없이 계속 썰매를 타고 놀았지요. 그때 그 소리를 얼음이 용을 쓰는 소리라고 했어요.”
“아, 두꺼운 얼음이 아래에서부터 금이 가는 소리가 그렇게 오묘한 음을 만들어내는 거구나.”
“오랜만에 들으니 참 새롭네요, 하하.”
다양한 음원들이 섞여서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생명체가 내는 신호와 흡사했던 그 소리는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 고요해 보이는 얼음판이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완재정을 나와 못 주위를 걷는다. 사진을 찍기에 가장 좋은 포인트는 완재정 맞은편의 물가에서 바라보는 전경이다. 위양못과 위양 마을, 멀리 화악산 능선이 유려하게 흘러 내려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러나 곧 그 평화롭던 정경이 어색하게 변했음을 깨닫게 된다. 송전탑 때문이다.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765㎸ 초고압 송전탑의 철골이 처음부터 저도 산의 한 부분이었다는 듯 존재감을 과하게 과시하고 있다. 소중한 목숨을 바치고,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감내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가 싸운다고 하시던 수많은 밀양의 할매 할배들…. 움막을 짓고, 무덤을 파고, 살아온 세월에 반비례해서 그만큼 가벼워진 몸피에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쇠사슬을 감으며 목숨을 건 저항을 짓밟고 거대한 철탑은 세워졌고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기는 흐른다. 위양마을 덕천할매는 올해도 곶감을 말렸을까?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 중에 크고 예쁜 것을 똑 따서 먹으라고 건네주시던 할매의 곱은 손이 생각난다.
위양못을 돌아 나오면서 얼음이 힘쓰는 소리를 다시 듣는다. 얼음이 힘쓴다는 표현의 깊은 맛을 되새겨본다. 수십 센티 두꺼운 얼음도 아래에서부터 실금이 가고 그 틈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 물과 얼음이 서로 부딪히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의 징후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언 땅속을 뚫고 올라온 여린 새싹이 깨트린 지표면의 균열을 보았을 때 느끼는 대견함과 같다.
기록적인 한파로 부산 바다가 얼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갯바위에 파도가 칠 때 바로 얼어붙어 기하학적인 고드름을 만들어놓았다. 갯바위 얼음은 아마, 파도가 녹일 것이다. 어쨌든, 얼음은 녹는다.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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