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이 슬프다. 낙동강 유역 너른 땅에 자리 잡아 농산물 집산지이며 교통의 요지인 밀양이다. 삼한 시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란 기록이 옛 이름인 미리벌에서 유래했다니 그 역사를 짐작할 만하다. 조선 시대 밀양향교 및 여러 서원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해 안동과 더불어 영남의 2대 유향을 이뤘다. 그만큼 고적과 명승, 민속놀이와 민요가 많다.

이 가운데 자연 유산을 미래로 이어가자는 취지로 2007년 밀양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거쳐 만든 것이 밀양 8경과 밀양 3대 신비다. 영남루 야경, 시례 호박소, 표충사 운해, 월연정 풍경, 위양못 이팝나무, 만어사 운해, 종남산 진달래, 재약산 억새가 밀양 8경을 이룬다. 땀 흘리는 사명대사 비석과 얼음골, 종소리 나는 만어사 경석은 3대 신비로 꼽힌다.

특히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고자 영조 18년(1742년) 세워진 사명대사 비석은 1910년 한일 병탄, 1919년 3·1운동, 1950년 6·25전쟁 등 국가 중대사가 발생하면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렸다고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다. 표충비라고도 한다.

이 비석이 또 땀을 흘렸다. 밀양이 슬픈 이유를 예고하듯. 박일호 밀양시장은 어제 “지난 17일 표충비가 땀을 흘렸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 26일 발생한 세종병원 화재로 39명이 목숨을 잃었고, 151명이 부상했다. 유족의 오열 속에 사망자의 장례식이 이어지고 있다. 밀양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슬프다. 병들고 약해질 때 찾는 병원에서 완쾌 대신 죽음을 맞았다. 더 슬프다. 느슨한 소방 규제와 허술한 대처가 피해를 키웠다. 더 뼈아프다.

문재인 대통령이 앞서 유족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정부가 ‘안전한 나라’를 다짐했으나 참사가 거듭되어서 참담하고, 또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화재 안전 기준 개선 등 재발 방지책 마련을 다짐했다. 어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그 방법을 내놨다.

‘아메리카 버닝 리포트’, 미국의 범정부 화재 대책 보고서다. 11년 새 각종 화재로 14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뒤 1973년 만들었다. 2년 동안 데이터를 축적하고 실질적인 예방 대책을 세웠다. 화재 피해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이치다. 스프링클러와 화재 감지기 설치 의무화가 이 리포트 덕분이란다. 땜질식 처방에 급급했던 우리나라로선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제대로 된 ‘코리아 버닝 리포트’로 밀양의 슬픔을 위로하기 바란다.

정상도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