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매서운 이맘때면 어릴 적 즐겨 찾던 만국기로 치장한 스케이트장이 생각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나게 스케이트를 탔던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복숭아뼈 밑에 생긴 물집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던 어느 날, 체육선생님으로부터 “스케이트 선수가 되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운동부는 ‘외인부대’처럼 보였다. 노는 시간이 부족했던 나에게 수업을 마치고 훈련하는 건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나는 육상 릴레이 대표로 뽑히고도 훈련이 싫어 학교 대표를 포기해 부모님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동부를 포기한 건 놀기 바빠서가 아니라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큰 소리로 스케이트 선수를 지도하는 코치의 격앙된 언행은 다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방과후 릴레이 연습에서 공개적 핀잔을 받은 경험은 소심하고 두려움 많았던 초등학생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마 체육계열 전공자라면 선배나 지도자로부터 집합과 폭언을 당한 경험은 한두 번 있을 것이다. 최근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간판스타 심석희가 코치로부터 폭행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잊을 만하면 고개를 드는 스포츠계의 고질병에 한숨이 나온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폭언·폭행·성추행과 같은 인권침해는 스포츠계 전반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문제의 본질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기틀도 마련해야 한다. 선수 시절 ‘내가 지도자가 되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정작 자신이 지도자가 되면 폭언과 폭력을 되풀이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승리 지향주의 또는 성적 지상주의이다. 경기 실적은 지도자나 선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이다. 폭언과 폭력은 나(지도자)를 위한 게 아니라 너(선수)의 성적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국가를 위한 것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돼 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수나 지도자 모두 윤리의식에 대한 인식과 교육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과거 많은 운동선수가 학창시절 운동에만 전념하느라 정규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기본적 소양이 부족한 채로 지도자가 된 경우가 상당수다.

얼마 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선수가 음주운전과 성추행 물의를 일으키고도 진정성 있는 반성보다 “야구로 보답하겠다”고 한 것은 엘리트 선수에게 잠재된 ‘결과 지향주의’를 잘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경기실적만 좋으면 돼. 운동만 잘하면 돼’라고 강조하는 성적 우선주의 경향과 지도자에게 1차 책임이 있다.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 선수의 이탈을 개인의 과실로 떠넘겨 버리는 종목별 경기단체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스포츠를 전인교육이라고 한다. 스포츠는 신체 활동뿐 아니라 규범과 윤리도 포함한다. 스포츠맨십과 페어플레이·예절 등 여러 가지 교육적 요소 모두가 스포츠의 범주에 속한다. 아무쪼록 ‘심석희 사태’를 계기로 정부와 대한체육회·경기단체는 폭언·폭행·성추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기반과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되풀이되는 고질병은 결국 평생을 운동에만 바친 우리 선수와 지도자 모두를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영산대 태권도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