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엄청난 눈이 내려 올겨울은 초장부터 힘들어지겠구나 싶더니, 다행히 더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산간벽지에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이 오면 모든 면에서 힘들다. 일단 눈이 녹기 전까지 승용차가 큰길까지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어, 읍내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마트에서 술 한 병 사 오기가 어렵다. 물론 도시에 살 때면 겨울엔 반드시 눈이 내렸으면, 하는 바람은 늘 있었다. 낭만적이고 꽤나 운치 있는 눈 오는 날을 기대하며 조하문의 ‘눈 오는 밤’을 늦가을부터 불렀다.

그날, 몇 년 만의 폭설이 내린 날 밤에 나는 읍내의 한 술집에 홀로 있었다. 아침 무렵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나온 길에 그만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집에 있던 아내가 “위험하니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오라”는 말에 내심 모처럼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귀촌한 작가 몇 분들에게 연락을 했건만 그들 역시 눈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손님이 끊긴 술집에서 처연하게 술을 마시다 우연히 옆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기사를 보고 눈이 번뜩 떠졌다.

울산시에서 올해부터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창작장려금’을 지원한다는 기사였다. 일정 소득 이하의 예술인들에게 지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창작준비금’ 지원제도와 얼핏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그쪽의 비현실적이고 까다로운 심사와는 달리 이쪽은 문화예술인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직업적 특성을 십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제한을 두지 않고 2년에 1회 조건으로 1인당 300만 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300만 원이라 하니 이 글을 읽고 있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겨우, 라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다. 특히 번듯한 직장 혹은 그런대로 버는 개인사업자들은 코웃음 치는 금액이지만, 오롯이 창작만을 고집하며 최저 생활을 견뎌내는 예술인들에겐 정말 큰돈이다. 내 주위에는 한 달에 30여만 원만 있으면 하루에 시를 50편 쓰겠다는 시인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한동안 신문을 덮고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창밖으로 아직 눈발이 휘날리고 술집의 연탄난로는 거의 꺼져가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춥지 않았다. 서울, 부산도 아닌 한때 공업도시라 불리던 울산에서 이런 정책이 나왔다는 게 조금 생소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것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작년 여름에 나는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울산시의 홍보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홍보영상이라기보다는 ‘간절곶’을 배경으로 한 한편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결과적으로 자기 고장으로 놀러 오라는 메시지였지만, 그때 나는 이 영상의 몽환적인 스토리텔링이 장난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해 겨울에 나는 마을주민들에게 떠밀려 ‘지방분권과 주민자치에 대한 교육’차 부산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울산시의 어떤 직원이 내가 소설가라고 밝히자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간의 토로하고 싶던 예술인들의 복지정책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었다. 교육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 직원은 추후 울산에 문화예술인들의 획기적인 처우 개선이 있을 터이니 “산청에서 이쪽으로 이사 오시라”는 친절한 농담도 잊지 않았다.

술집에서 훈훈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칠 년 전에 “며칠 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은 밥이랑 김치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주세요” 라는 쪽지를 남기고 빈곤 속에서 고독하게 하늘로 떠나간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최고은’ 씨가 생각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명문, 한국종합예술학교 영화학과를 나와 그런대로 촉망받던 그녀가 그럴진대 아직 숨 쉬고 사는 수많은 무명작가를 비롯한 예술가의 삶은 과연 그녀보다 나을까. 아니면 그보다 세월이 흘렀으니 더 나아졌을까?

읍내의 허름한 모텔 앞에서 나는 두 팔을 벌려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 자본 앞에서,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질서에 질식되어 하루하루의 생계에 굴복된 나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위해 과감하게 이 정책을 추진한 울산시의 깨어 있는 관계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