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가 옳았다. 결과론이지만,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뒤흔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 그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출간 초기에 읽은 건 아니었다. 2시간이면 독파 가능한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출간된 지 1년쯤 지난 작년 연말께였다. 출간 초 신문에서 서평과 작가 인터뷰를 보기는 했지만, “독특한 제목이네”라며 흘려 보냈다. 대선 직후 누군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해 말 한 대형 인터넷서점 회원 선정 ‘2017 올해의 책’에 뽑혔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잡았다. 참으로 얄팍한 도서 선택법이 아닐 수 없다.

일독 후의 ‘울림’은 기대만큼 세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의 공포, 피로,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라는 뒤표지의 글귀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역시 여자가 아닌 탓일까? 공감은 갔지만 절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가가 여백을 너무 많이 남겨놓는 바람에 힘겨운 숙제만 실컷 떠안은 기분이었다. 10대 중·후반인 딸들에게는 더욱 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주말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책을 두 번 이상 읽지 않는 ‘얕은’ 독서 습성을 깨트린 것은 한 여자검사가 보여준 용기와 고백이었다. 72년생 서지현 검사. 지난달 29일 검찰 내부 게시판을 통해 8년 전 생면부지의 간부 검사에게 당한 성추행 사건을 고발한 당사자다. 그녀의 ‘고발’로 대한민국이 뒤집어졌고, ‘침묵의 성’에 갇혔던 사건은 햇볕 속으로 나왔다. 이를 계기로 변호사 출신 여성 국회의원, 전직 명문대 여자 교수, 대형 항공사 여승무원 등이 “나도 당했다”며 이른바 ‘미투(# Me Too)’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서 검사의 글 3편 중 소설 형식의 일기가 있다. 화자는 ‘여자’ 혹은 ‘72년생 박지현’이라는 인물이다. 이 화자를 통해 서 검사는 사건의 실체와 심적 고통의 편린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바로 이 글에서 ‘82년생 김지영’을 만났다. 서점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은 ‘72년생 박지현’은 읽던 책을 덮는다. 그 책이 바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다. 여자는 “하아, 나보다 10년이나 어려도 여전히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독백한다. 이어지는 여자의 말. “딸을 낳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세상은 이렇게나 그대로인걸. 10년이 지나도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도 세상은 변하긴 영영 글렀어.”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72년생 서지현’의 일기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다. 서 검사는 조남주의 소설을 통해 자신을 다독이고, 용기를 낸다. 그녀는 “누군가 나에게 ‘82년생 김지영’ 속 이름 모를 여성처럼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얘기해 주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라고 고백한다. 서 검사가 TV 뉴스 인터뷰에서 “자신이 죄인인 양 침묵 속에서 괴로워하는 피해 여성들에게 당신 탓이 아니라고, 당신은 죄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언급한 부분과 맥이 닿는다. 그녀는 또 일기에서 “마지막 작품해설에선가 ‘사회가 그랬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부당함을 그냥 넘기지 않고 또박또박 이야기해온 여성들도 있었다”는 부분을 거론한다. 자신이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게 되는 과정을 우회적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의 글을 재삼 읽고난 후의 고민은 역시 우리 사회의 성적 불평등과 차별, 폭력을 해소할 근본적인 방법에 머문다. 두 사람이 낸 숙제다. 조남주가 여백을 통해 남긴 숙제를 서지현은 용기 있는 고발로 풀었다. “이제 어쩔래?”라는 두 사람의 질문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결국 해법은 두 가지다. 우선 권력, 계급, 돈으로 표출되는 남녀 간 힘의 불균형을 줄이려는 제도적 노력이다. 우리나라의 성평등 수준은 참담하다. 세계경제포럼이 2014년 발표한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142개국 중 117위, ‘경제활동 참가 및 기회’는 124위, ‘동일 직군 남성과의 임금 평등’은 125위다. 우리나라의 남성 근로자 대비 여성 임금은 63% 수준으로 OECD 29개국 중 꼴찌다. OECD 평균 85%와 비교하면 격차는 2배가 넘는다. 하지만 이런 남녀 간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은 어쩐지 요원해 보인다.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있다. 바로 ‘서지현의 일기’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이다. ‘딸을 낳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서 검사의 독백이 섬뜩하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결국 남녀 사이에서 벌어진다. 딸에게는 ‘무작정 참지 말라’ 아들에겐 ‘차이를 인정하라’는 주제를 던져보자. 여전히 세상의 절반인 우리 딸들의 미래를 체념과 침묵의 고통 속에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딸들만은 성차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자는 것이 서지현과 조남주의 진짜 소망이다.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