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욕구인 성욕은 직접 충족되지 않더라도 생존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승화를 통해 성욕이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되어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인격의 밑바탕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 성욕을 주목한다. 사랑은 서로의 가치 있는 만족스러운 경험이고, 성행위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다. 즉, 성행위는 상호 간에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친밀감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성행위가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 상호 간에 의사소통의 의미도 지닌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성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얻고 행복을 느낀다. 만족스러운 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성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만족스러운 성을 구가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의사나 감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성적 행위나 표현은 인간의 본성을 저해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자 반인격적인 행위다. 성추행은 동의하지 않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가학적 도착행위라는 점에서 반인격적이다. 피해자가 겪는 분노와 치욕의 상반되는 감정은 복잡한 심리적 상황을 야기한다. 여기에 권력의 사회적 요소가 작용하면 보호막이 없는 약자는 현실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성폭력은 성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성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분노를 해소하려는 시도다. 실제로 가해자들은 남자다움, 우월감, 지배욕 등의 과시를 노린다. 이를 통해 성적 능력, 권력, 지배력을 증명함으로써 내재된 열등감이나 왜소감을 부정하려고 애쓴다.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분노 경멸 증오심을 풀어보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고,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한 복수심을 만만한 여성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면서도 성폭력을 반복하는 이유다.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부당 행위나 횡포를 갑질이라 통칭한다. 강자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지 못한 데서 오는 약자의 자괴감과 굴욕감은 마음 깊이 열등감으로 남아 지속적으로 자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적으로 갑질을 당할 때는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을 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우월적 위치의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성폭력은 가장 저급한 갑질이다. 성적인 갑질로서 얻는 건 성적 만족이 아니라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권력자로서의 자아도취다.

최근, 문학적 천재성으로 추앙받던 어느 시인이 최영미의 시에서 문학적 권력으로 여성 문인에게 성추행을 일삼는 괴물로 묘사되면서 한국 문단이 들끓고 있다. 당사자는 후배 문인에 대한 격려와 친근감의 표시였다지만 성추행을 당했다는 시인은 그를 ‘똥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로 비하한다. 필자는 최경미의 ‘괴물’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 정철(鄭澈)과 기녀 진옥(眞玉) 간의 수작(酬酌)을 떠올렸다. 원래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뜻인 수작은 성적으로 유혹하고자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철은 진옥에게 농염한 성애를 담은 시로 수작을 건다. “옥(玉)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진옥은 정철의 수작에 곧바로 시 한 수로 응한다. “철(鐵)이 철이라커늘 섭철(攝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철저한 계급적 신분 사회인 조선 시대에도 미천한 신분인 기녀에게 성적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성의 억압과 개방이라는 시대적 차이에서 연유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남성들의 가부장적 성 의식은 조선 시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케이트 밀레트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던 성이 실은 남성은 지배자, 여성은 피지배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치 행위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고 성을 통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사회가 아무리 민주화된다고 해도 이 같은 불평등한 성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성 의식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가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라는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의 참뜻에 걸맞게 성 의식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각성이 필요하다. 인생의 참다운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부산대 의전원 교수·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