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자신의 몸이 커다란 벌레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모습에 놀란 가족과 주변인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그레고르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방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결국 어느 이른 아침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죽어갔다.
독일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저서 ‘변신’의 내용이다. 카프카는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레고르가 갑자기 닥친 불행에 사회에서 버림받는 모습을 담아냈다.
정부는 최근 금융 취약계층의 재기 지원을 위한 ‘장기소액연체자지원 재단 법인’을 출범시키고 지난 26일부터 1000만 원 이하의 채무를 10년 이상 갚지 못하고 있는 장기소액연체자들로부터 신청 접수를 하고 있다.
‘힘들어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시장경제의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감안하더라도 실제 재산이나 소득이 없어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장기연체의 굴레를 쓰고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사회구성원들에게 소중한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 또한 현대 신용사회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에 따른 페널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옳은 말이다. 하지만 생계를 이어갈 소득이 없어 빚을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언제까지 페널티를 주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열심히 돈을 벌어 빚을 갚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기소액연체자들이 처한 경제적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1899~1960)는 사회적 규범에서 볼 때 어떤 특정인의 행위가 이 규범에서 벗어났을 경우 구성원들이 단지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나쁜 행위라고 규정하고 당사자를 일탈자로 낙인찍으면 결국 그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낙인효과(Labeling Effect)’를 설명했다.
장기소액연체자들도 한 번 채무불이행자로 낙인(Labeling) 찍히게 되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빚을 갚고 싶어도 갚지 못하는 악순환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갑작스럽게 닥친 채무불이행자라는 낙인 때문에 카프카의 소설 속 그레고르처럼 사회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10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가둔 채 희망 없이 지내고 있는 이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의 어두운 사각지대에 숨어 있는 장기소액연체자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재기의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빚을 갚으려는 의지가 있어도 고령이나 질병 또는 장애 등으로 갚을 여력이 없어 오랜 기간 채무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다시금 당당한 경제주체로 돌아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줘야한다.
하지만 버티면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 문제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먼저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로 도움이 꼭 필요한 대상을 선별하고 있다. 우리 공사는 국세청, 국토교통부 등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지원대상자 한 명 한 명의 재산보유 여부와 소득을 확인하고, 최근 3년 동안 출입국 기록을 확인하여 상환능력이 있으면서도 정책 수혜를 받게 되는 경우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계획이다. 실제로 국민행복기금 미약정 장기소액연체자 40만3000명을 대상으로 재기 지원 여부를 심사한 결과 월소득 99만 원 이하인 자로서 보유 재산 및 출입국 기록이 없는 25만2000명이 추심 중단을 지원받게 되었다.
또한 정책이 보다 실효성 있는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책 대상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공사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분들 가운데 공시지가 1000만 원 이하인 1000㎡ 이하의 농지, 1ｔ 미만의 영업용 트럭 등 생계를 위해 부득이하게 재산을 보유하거나 출입국 기록이 있는 경우 정당한 사유를 소명하면 추가 지원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지난 주말 부산 해운대 동백섬을 찾으니 추위를 뚫고 피어난 동백꽃이 산책로를 따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 속에서도 능히 꽃을 피우네’라며 동백꽃(冬栢花)이란 시를 남긴 고려 시대 시인 이규보의 마음이 절로 이해되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빚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추운 겨울과 같았을 것이다. 이번 대책을 통해 장기소액연체로 사회의 그늘 속에 있던 이들이 겨우내 피어난 동백꽃처럼 재기의 꽃망울을 터트리며 만개하길 기대한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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