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매섭고 긴 추위더니 입춘을 지나고부터는 바람 속에서, 햇살 속에서 언뜻언뜻 봄이 느껴진다. 부지런한 지인이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평화공원에 피어 있는 홍매의 소식을 전해왔다. 작년에 봤던 그 꽃이고, 아직 눈이 오는 지역도 있지만 봄의 전령을 맞이한 감흥은 늘 그렇듯 신선하다. 문정희 시인의 시구처럼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인데도 그렇다. 그처럼 봄은 언제나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오게 하여 겨울을 보내는 마음에 또 다른 희망을 갖게 한다.

그동안 갖가지 우려를 안고 시작했던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리의 아들, 딸들은 정치인들의 끝없는 정쟁과 다수 문화 권력자의 추태로 어수선한 국내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열정으로 뭉쳐 각자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특히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 스켈레톤이나 컬링 선수들의 활약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메달이 값지지만 메달이 없었던 종목이라고 해서 선수들의 노고가 가벼울 수는 없다.

스포츠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TV중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잡념을 쓸어가는 장점이 있다. 지난 2주 동안 설원에서 펼쳐지는 겨울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 와중에 팀추월의 불협화음을 목도했다. 함께 달려가야 하는 동료를 따돌리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준 선수들의 철없는 행동은 한심하고 안타까웠다. 이상화와 일본의 고다이라 선수처럼 경쟁자이지만 서로 위로하고 칭찬하는 미덕을 갖추지는 못할지언정 작심하고 나온 듯 동료를 따돌리는 모습은 국제적인 망신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따돌림을 당한 선수나, 따돌림을 주도한 선수나 빙상계의 고질적인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었다.

절대 권력 앞에서 용기와 소신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혼자 목소리를 내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고 피해를 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침묵하고 넘어간다. 그렇게 곪은 상처가 어찌 안 터지고 배길 것인가. 근래 봇물 터지듯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들어내고 새살이 돋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활발한 경제 성장 속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인품을 갖추지 못한 권력자들의 횡포와 어떤 사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첫 여성작가 김명순을 비롯한 신여성들이 살던 시대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창간한 월간종합지 ‘청춘’의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단편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소설가가 되었다. 그녀는 1896년 1월, 평양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문신 관료였던 아버지와 기생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1912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 일본 시부야의 국정여학교에 다니다가 졸업을 앞둔 1915년 7월, 데이트를 하던 이응준(우리나라 초대 육군참모총장)에게 강간당한 후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국내 언론에는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실연당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되어 ‘방종하고 타락한 여자’로 낙인 찍혔다.

소설이 당선된 후, 이화학당을 거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여자전문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소설가 전영택의 권유로 ‘창조’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 시대 신여성들의 내면 심리를 현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을 주로 썼고, 시는 연정이나 추억, 자연의 아름다움 등을 노래했다. 하지만 당시 문단의 계몽적 성격과 맞지 않아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 속에서도 그녀는 보들레르의 시 ‘저주의 여인들’과 에드가 앨런 포의 ‘상봉’을 번역하기도 하면서 가부장적 질서와 윤리적 억압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녀는 1939년, 김동인이 ‘김연실전’을 발표하자 그러한 노력들을 모두 접고 동경으로 떠났다. 김동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해 무절제한 생활로 파멸해가는 여주인공 김연실을, 김명순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쿄로 간 김명순은 1945년 해방 소식을 듣고도 귀국하지 못할 정도의 극빈 속에 살다가 1951년 6월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의 근대사회는 남성이란 성(性) 자체가 권력이었다. 계몽주의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였음에도 동정은커녕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들은 영민하고 아름다운 한 여성을 드러내놓고 짓밟았다. 현대사회에서는 권력을 쥔 남성들이 은밀하게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미투’ 운동은 음험한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들의 도전장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에도 드디어 봄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