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아흔아홉 돌을 맞으며 우리는 참혹한 영상 하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종전 무렵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들이 발가벗겨진 채 집단으로 살해당하고 또 불태워지는 장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광경만 해도 가슴이 무너지는데,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은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했다. 위안부에 관해 일본 정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기존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물론 냉정히 돌아보면 이런 반응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들은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한 적이 거의 없고 우리 국민은 번번이 분노와 무력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심지어 보란 듯이 각료들이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 참배하기도 했다. 전범 국가로서의 반성은커녕, 원폭 피해국 코스프레를 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있는 일본. 종전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동아시아 현대사 속에서 한일관계를 보아야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수십 년간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수탈을 하고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덕분에 그 모든 범죄의 주범 일왕을 보호할 수 있었고 전범재판에서도 겨우 7명의 A급 전범만이 사형에 처해졌다. 피해국들에서 열린 B, C급 전범 재판에선 무려 98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는 재판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강대국의 국가이익 앞에선 한국인들의 대일 감정이나 원한, 정당한 전후처리와 배상 따위는 한낱 장애물에 불과했으며, 일본 우익은 그 덕택에 천황제와 대부분의 전범을 지켜내며 현재의 국수주의적 일본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한일관계는 어떻게 이 모양이 되었는가? 미국의 압박과 친일 수구세력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명분 없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데 급급하여 굴욕적인 이른바 한일기본조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1965년에 계엄령과 위수령까지 동원해서 맺은 그 조약의 핵심내용은 3억 달러를 10년 이내에 분할 무상공여(배상금이 아니다) 한다는 것이었다. 고작 3억 달러! 거의 천만 명에 이르는 징병, 징용자와 수십만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36년에 걸친 조선 민중 전체의 피눈물의 대가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물론, 5·16쿠데타의 주도세력이 대부분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조약에 왜 ‘사과’나 ‘반성’ ‘배상’이란 표현이 단 한 차례도 들어 있지 않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한일관계 재정립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별다른 전환점을 만들지 못하다가, 50년 후 국정 농단에 여념이 없던 그 딸 또한 미국의 요구에 떠밀려 치욕스러운 위안부 합의를 맺고 만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잘못 끼워진 단추를 바로잡아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옷을 바르게 입을 수는 없다. 물론 대다수 일본인의 역사의식부터 복잡한 한미일 관계까지, 너무 많이 왜곡되어 있어 단숨에 바로잡을 순 없다. 그나마 지금은 정부와 국민이 뜻을 모아 이 일을 해나갈 드문 기회이다. 정부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고,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하나씩 해 나가야 한다. 이번 삼일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잘못된 역사는 우리가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말처럼 ‘일본은 인류 보편의 양심으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하며, ‘진실한 화해와 반성 위에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로선 이 일에 뜻있는 우리 국민의 역할이 적지 않아 보인다.

부산에서는 영사관 앞 소녀상에 이어 그 옆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하는 운동이 한창이다. 한일협약에서 맥없이 묻혀버린 강제징용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정상적인 한일관계의 밑거름으로 삼자는 뜻이란다. 많이 늦었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잡고, 널리 알리고, 조금씩이나마 함께 풀어나가는 일, 그것이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섰던 99년 전 우리 선조들에게 떳떳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공존공영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데도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정치개혁부산행동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