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 핫이슈인 요즘, 미국 헌법 제정에 얽힌 이야기가 떠오른다. 우리 여건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해도 타산지석 또는 거울이 될 만해서다.

미국 역사를 보면, 1776년 독립선언 후 연방헌법을 제정하기까지 엄청난 진통이 따랐다.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난 13개 주(州)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각기 주장이 맞서다 보니 헌법 제정 작업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다 1787년 제헌회의가 각 주 대표로 대의원회를 설치하면서 물꼬가 트였다. 대의원회는 협상을 거듭한 끝에 ‘대타협(The Great Compromise)안’을 도출해냈고, 제헌회의는 이를 투표로 통과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국 헌법은 타협의 여러 묶음, 즉 대타협의 산물인 셈이다. 크기가 서로 다른 주(州)의 이익과 생각들을 마치 조각보처럼 이어 묶었다는 뜻에서다. 자기 입장만 고집하거나 관철시키려 하지 않고 상대에 양보할 것은 과감하게 양보한 덕분이다. 그러나 결코 어길 수 없는 원칙마저 흥정의 도마에 올린 건 아니다. 예컨대 중앙-지방 간 권력을 분점하는 연방주의,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지키면서 이견을 좁혀나갔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개헌에서도 대타협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개헌 정국이 꽉 막혀 있어서다. 여야 모두 개헌을 표방하면서도 진정한 협의는커녕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국회 차원의 개헌특위는 1년3개월 넘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개헌시계는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여야는 합의안 마련에 지혜를 모으는 건 고사하고 책임만 떠넘기는 꼴이다. 개헌을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으로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합의하지 않는 한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6일 개헌안을 발의한들, 개헌저지 의석을 지닌 한국당이 반대하면 국회 통과는 난망이고 올 6월 국민투표에도 부칠 수 없다. 지난 대선 때의 ‘6월 지방선거와 개헌안 동시 투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한국당이 괘씸하다고 해도 국회 의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그들이다. 그러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당을 개헌 협상의 장에 나오도록 하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개헌은 타협으로 이뤄진다. 어느 일방의 주장만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파란만장한 우리 헌정사에도 여야 합의 개헌의 전례가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일궈낸 제9차 개헌(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그것이다. 헌정사상 최초의 합의 개헌이라 의미가 각별하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개헌 추진이 난항을 겪자 각 당 대표로 ‘8인 정치회담’을 꾸렸다. 8인 정치회담은 협상 시작 한 달 만인 8월 31일 합의안을 최종 타결지었다. 20차례의 협상 과정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특히 대통령 4년 중임제냐(민주당), 대통령 6년 단임제냐(민정당) 등을 놓고 대립하면서 결렬 위기가 높았다. 하지만, 서로 양보와 절충으로 합의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바탕에는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압력으로 작용한 요인이 컸다고 하겠다.

31년이 흐른 현재 상황도 그때와 비슷한 거 같다. 국민적 저항에 의해 개헌이 추진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개헌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분권이다. 19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가 키워드였고, 지금은 중앙정부와 대통령에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합리적 균형을 이루는 일이 요체다. 여야 간 개헌의 최대 쟁점인 권력구조(정부 형태)만 해도 그렇다. 야당 측이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제를 주장하는 것에 여당은 무조건 거부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적정한 분산 차원에서 타협할 여지가 많다. 우리는 미국의 분권형 대통령제와 달리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 게 사실이다.

개헌 투표시기에서도 한국당은 6월 지방선거 동시 실시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득이 될 게 없다. 동시 실시하면 여당에 유리할 거라는 선거공학적 계산은 둘째치고라도,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6월 개헌투표가 무산되면 분노한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가는 개헌이 좌초할 판이다. 어떻게 만든 개헌 기회인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더욱이 지방의 생존과 미래가 걸린 자치분권 개헌이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이번 개헌은 국민 4분의 3, 국회의원 9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 1987년 때와 다르게 개헌에 대한 여론수렴이 충분치는 않지만 상당 수준 진행됐고, 구체적인 개헌 방안도 이미 나와 있다. 이제는 여야 정당 지도부가 협상으로 대타협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촛불 민심과 국민의 압도적 열망에 의해 이뤄지는 지금이 개헌의 최적기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국민이 원하는 개헌은 앞으로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