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개헌을 들고 나왔지만 여야의 대권주자들이 철저히 무시하는 바람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문제건, 개헌이건 진짜 중요한 정책은 대통령의 임기와 힘이 남아 있을 때 시도해야 한다는 걸 그때 확실히 깨달았을 거다.


헌법 속에는 지난 수천 년 인류가 쟁취해 온 생존권 개념, 민주와 평등의 철학, 공동체적 윤리,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공동선 등 수많은 철학이 압축돼야 한다. 나라와 겨레의 청사진이 그려지기도 해야 한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한다. 이제부터 여야 간에 치열한 정쟁이 시작될 판이다. 올해 상반기는 남북·북미 정상회담과 개헌 문제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전세 낼 것 같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직선제를 시행하려고 서둘러 고친 헌법이지만 시대정신으로 따져도 큰 하자는 없었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필두로 헌법재판소가 설치됐으며, 복지와 인권이 보강되고 경제민주화 조항도 들어갔던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 헌법으로 30년을 버텨왔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커졌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으니 이젠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장만해야 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문 대통령이 내놓은 개헌안은 아쉬운 대목이 없진 않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대체로 동의한다. 눈여겨 본 항목은 전문, 국민 기본권, 지방자치 활성화, 권력구조 개편 등등이었다. 우선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을 삽입한 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재확인하면서 항일운동, 4·19 반독재 투쟁,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한 끈에 묶어 우리 현대사를 재구성한 것은, 젊은 시절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맞으며 아스팔트를 뛰어다녔던 ‘386세대’인 내겐 감회가 깊을 수밖에.

국민기본권도 마찬가지. 천부인권론을 헌법 조문에 명확히 담은 것, ‘근로’라는 사뭇 관료적 단어를 주체적인 ‘노동’으로 바꾼 것, 공무원의 노동3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한 것 등이 눈에 띈다. 생명권, 안전권, 정보기본권, 주거권, 건강권을 명문화한 것도 시의에 맞다. 생명권이나 안전권은 세월호 사건이나 각종 대형 재난을 겪은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일 터. 주거권, 건강권은 국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로 21세기형 문명국가라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닌가. 정보통신 분야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국민의 정보 활용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만큼 정보기본권도 손질해야 할 거다.

개인적으로 신선한 느낌을 받은 대목은 기본권 조항의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명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은 근대국가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 아닌가. 20세기 파시즘 시대에선 ‘국민’은 국가에 복속되고 동원되는 ‘피지배자’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했다.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인간으로서의 천부적인 기본권, ‘세계 시민권’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보편 단어인 ‘사람’에 압축한 발상은 좋아 보였다.

토지공개념 역시 주거 생존권의 보장이나 국토의 합리적 이용이란 측면에서 필요하겠다. 경제주체의 상생을 강조한 경제민주화의 강화도 나쁘지 않다. 다만, 지방분권 조항엔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한민국은 지방분권화를 지향한다’는 선언적인 조항을 넣어 분권화 정책의 근거를 마련한 건 평가할 만하지만 행정·입법·재정의 실질적 자치화의 보장은 미흡해 보인다. ‘법령의 범위 안에서’를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에서’로 확대했다곤 하지만, 강고하기 짝이 없는 ‘서울공화국’의 해체를 이끌 처방이 과연 될 수 있을까 미심쩍은 거다.

무어니 해도 현실적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권력구조 개편일 터다. 문 대통령은 인사권, 예산권 등 대통령 권한의 축소를 전제로 ‘대통령 4년 연임제’를 내놓았다. 국민 선호도를 반영한 것이라지만 문제는 야당이 이걸 받지 않겠다는 게 아닌가.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은 의원내각제 또는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을, 국무총리가 내치를 맡는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총리의 국회 지명’이 보장돼야 한다고도 한다. 반면 정부 여당은 ‘국회의 총리 지명권’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뒤섞인 것이어서 국정 혼란을 부를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있다. 결국 권력구조 개편 합의 여부가 개헌 성사의 열쇠인 셈.

자, 개헌안의 내용은 그렇다 치고 진짜 관심사는 따로 있다. 과연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느냐는 것 말이다. 초안을 아무리 잘 다듬으면 뭘 하나.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말 것을. 개헌 국민투표 시한을 6월 지방선거에 맞물려 승부수를 띄운 대통령과 청와대가 자유한국당 혼자서도 개헌을 저지할 수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자유한국당이 지방선거 동시 실시 공약을 뒤엎고 개헌 시기를 늦추자는 것엔 숨은 이유도 있다. 가뜩이나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는 판에 두 선거를 함께 실시하면 투표율이 크게 높아진다. 청년층도 대거 투표에 참여하겠지. 그러면 자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이 될 우려가 크다는 것. 하고 보면 제1야당의 처지가 왜소하다.

문 대통령의 심중은 이럴 거다. 야당들 하는 꼴로 보면 연말이나 내년으로 늦춘다 해서 합의를 이루긴 어려울 거다, 설사 2년 남은 국회의원 총선 후로 미룬들 여당 단독으로 국회 의석 2/3를 차지할 수는 없을 거 아닌가, 어차피 다를 게 없다면 지금 밀어붙이는 게 낫다. 문 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노무현 시절의 학습효과도 한몫했을 터.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개헌을 들고 나왔지만 여야의 대권주자들이 철저히 무시하는 바람에 ‘다음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 한다’는 부도수표 한 장 받아들고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문 대통령은 남북문제건, 개헌이건 진짜 중요한 정책은 대통령의 임기와 힘이 남아 있을 때 시도해야 한다는 걸 그때 확실히 깨달았을 거다.

대통령의 전략은 야당에 대한 압박과 포위일 터. 개헌은 내 개인 거취와는 상관없다, 나는 사심이 아니라 진짜로 나라의 미래에 큰길을 닦으려는 거다. 이걸 내세워 국민을 설득하겠지. 야당에게 1년이나 시간을 줬지만 허송세월하지 않았느냐, 시간을 더 준들 국회가 합의안을 만들어 내겠느냐. 이것도 설득 논리의 하나다. 대통령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도를 무기 삼아 야당이 끝내 개헌을 파토 놓는다면 앞으론 선거에서 국물도 없을 거란 걸 각인시키자는 거겠지. 남북·북미 회담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 대통령의 인기가 크게 올라갔는데도 야당이 개헌안을 부결시키면 비난 여론이 태산처럼 쌓이게 된다. 지방선거에서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을 게 확실해진다면 막판에 야당도 타협하자고 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보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호락호락 굴복할까. 객관적으로 봐서 통과보다는 부결될 확률이 훨씬 높은 게 지금 형편이다. 어깃장 놓기 좋아하는 ‘홍 반장’ 스타일로 봐선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한가지이니 이판사판 ‘맞짱 뜨겠다’고 나설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권이 타격을 입지 않을 것도 아니다. 마음먹고 추진한 국가 중대사를 성사시키지 못한 데 따른 책임론이 불거질 거다. 무엇보다 이번에 실패하면 문 대통령의 임기 중에 개헌은 물 건너 갈 공산이 높아지고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 되지 않겠나.

그러니 문 대통령이 개헌안은 띄우더라도 협상의 여지는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개헌안을 발의한 후에라도 여야가 대통령 안을 전폭 수용한 개헌안에 합의한다면 자신의 발의를 철회하고 국회에 공을 넘기는 식 말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전제로 해서 국회에 총리 추천권을 준다는 정도의 타협안이면 야당도 못 이기는 체 받지 않을까. 글쎄, 총리 추천을 둘러싸고 또 박 터지게 싸울 게 아니냐는 걱정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야당에도 ‘까치밥’은 남겨 주는 게 정치의 금도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완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야당이 헌법 전문에 시비를 걸면, 특정 정권의 공이 아닌 국민 전체의 땀과 눈물이라는 방식으로 ‘산업화’의 족적을 담아서 나쁠 건 없겠다 싶기도 하다.

헌법은 국가 운영의 전범(典範)이다. ‘나라의 기둥에 새겨 넣은 말’이다. 헌법 속에는 지난 수천 년 인류가 쟁취해 온 생존권 개념, 민주와 평등의 철학, 공동체적 윤리,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공동선 등 수많은 철학이 압축돼야 한다. 나라와 겨레의 청사진이 그려지기도 해야 한다. 이참에 새 옷 장만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래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국가의 백년대계인 헌법을 시대에 맞게 손질하라는 게 자신들에게 내려진 국민의 명령임을 정치하는 자들은 깊이 깨달을 때다.

소설가·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