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곰’ 같은 이정임입니다. 겨울이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종일 잠만 쿨쿨 자다가 봄이 오면 겨우 일어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새 학기를 맞아 한 도서관에서 초등부 고학년 독서토론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첫 수업 자기소개 시간에 나는 곰에 빗대어 자신을 설명했다. 겨울만 되면 엄청 게을러지고 같이 사는 고양이들과 함께 잠을 많이 자고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른이 왜 그러냐”며 거짓말 같다고 깔깔댔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진짠데.

1년 중 두어 달 내가 바짝 움직이는 기간이 있다. 봄꽃 피는 시기다. 매서운 한파를 버틴 매화가 가까스로 꽃잎을 내밀 때쯤 나는 침대에서 내려온다. 엉망이 된 집안을 조금씩 정리하고 치우다가 펑, 펑, 벚꽃이 터지면 본격적으로 바삐 움직인다. 겨울옷과 이불을 세탁하고 집안 곳곳을 재정비하고 청소하고 집 안에 있던 화분을 옥상으로 내놓고 들여다본다. 해야 할 것들을 체크해서 계획을 세우고 밥을 해 먹기 시작하고 구석에 처박아 둔 영양제도 챙겨 먹는다. 가만히 땅속에 뿌리내리고 있던 식물이 봄을 맞아 온 힘을 다해 움직이는 것처럼, 침대 속에 발 뻗고 숨죽이던 내 신체도 ‘움직씨’ 즉 ‘동사’ 그 자체로 변하는 것이다.

봄이 되면 동사로 변하는 게 또 있다. 바로 고양이다. 햇볕 좋은 옥상에 젖은 이불을 들고 올라가면 함께 사는 고양이, 고래가 따라나선다. 작년 여름에 남편이 옥상의 가장자리에 철망으로 울타리를 친 다음부터 우리 집 고양이들은 옥상까지의 산책이 가능해졌다. 심심하면 혼자서도 곧잘 나가 옥상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는데 주인과 함께 나가는 것이 좋은지 내가 옥상에 가는 기척을 느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따라온다. 그런 고양이라 해도 겨울에는 옥상에 가서도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있다 금방 돌아오기 일쑤였다.

내가 이불을 너는 동안 고래는 태양에 달궈진 옥상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뜨끈뜨끈한 열기로 몸을 데우다가 내가 옥상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물을 주기 시작하면 가까이 다가와 심어놓은 캣그라스(귀리와 밀 등의 싹. 스트레스 완화와 속으로 삼킨 털 뭉치인 헤어볼을 배출하는 데 좋다)를 뜯어 먹는다. 화분 보기를 끝내고 나면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옥상 차양 아래에 앉아 쉬는데 그동안 옥상 여기저기를 뛰어다닌 고래는 쏟아지는 햇볕의 한가운데 앉아서 꾸벅꾸벅 존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제목으로 사진으로 찍는다면 저 장면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에게 일광욕은 보약이다. 햇빛을 쐬면서 비타민D를 합성하고 털도 살균한다. 햇빛은 피부의 곰팡이를 없애주고 우울증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고양이에게만 보약일까. 식물도 사람도 저 봄 햇살에 이렇게까지 움직이는데. 내가 겨우내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햇빛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던 나는 겨울이 지독히도 싫었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유일하게 바깥 생활이라 할 만한 등하교 시간은 온통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차갑게 얼어붙던 우울한 새벽이 떠올라서 그 뒤 이십 년 동안 겨울을 앓았다. 겨울만 되면 오후 6시도 못 되었는데 컴컴해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야속해서 마음이 더 빨리 어두워졌다. 그런 내게 해가 길어지는 봄이 왔으니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꽃잎보다 더 빨리 날아가고 고양이보다 더 빨리 굴러야지.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이 골똘히 쓰고 있는 자기소개를 훔쳐본다. ‘게임만 생각해서 ‘게임’ 같다는 누구누구…, 먹을 것만 생각해서 ‘돼지’ 같다는 누구누구…’ 나는 속으로 ‘아이들이 왜 그러냐’며 섭섭해진다. 너희는 저 나무를 간질이는 바람 같거나, 이 세상 어디든 목적지 없이도 흥미롭게 둥둥 떠가는 민들레 씨앗 같거나, 큰 바다 향해 살얼음을 깨고 용감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의 윤슬 같은 아이들인데. 그러다 깨닫는다. 아, 지금은 토요일 오후 2시지. 저 봄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 수 없는 이 건물 속에 너희를 붙박아두고 창밖의 봄 햇살을 상상하길 바라다니.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아이들과 야외로 나가 수업해야겠다. 존재 자체가 움직씨인 아이들이 “나는 ‘봄’입니다” 외칠 수 있도록. 꽃잎보다 가볍고 고양이보다 재빠른 동사가 될 때까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