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회의사당 앞에는 말을 탄 리처드 1세(1157 ~ 1199)의 동상이 있다. 용맹과 막강 전투력으로 ‘사자왕 리처드’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서양에서 십자군 최고 영웅으로 통한다. 십자군 전쟁의 영웅으로 기독교권에 ‘사자왕 리처드’가 있다면 이슬람권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 살라딘(1137~1193)이 있다. 살라딘은 빼앗겼던 ‘성지 예루살렘’을 88년 만에 되찾기 위해 1187년 3차 십자군과 전투를 벌인다. 당시 그의 대척점에 선 십자군 총사령관이 바로 리처드다.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권을 재통일해 결국 서방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영웅이지만, 끊임없이 문명 간 화해와 공존을 추구했다. 특히 리처드에게 베푼 통 큰 아량은 유명하다. 야파 전투 도중 리처드가 낙마하자 “고귀한 사람은 땅에서 싸우면 안 된다”며 자기 말을 보냈다. 리처드가 열병에 걸리자 위로편지와 약, 얼음을 보내기도 했다. 예루살렘 탈환을 앞두고는 성 안의 십자군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평화협정을 제안, 무혈입성을 이뤘다. 그 후 일체의 살육과 약탈을 금지하고, 유대 교회도 허용했다. 88년 전 예루살렘에 입성한 1차 십자군의 살육 및 약탈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런 살라딘의 본심이 통했을까. 그로부터 700년 동안 예루살렘 거리에서 만큼은 전쟁으로 인한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인류가 건설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가 살라딘의 근거지였다.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최후의 보루를 지켜낸 살라딘의 동상과 무덤이 이곳에 있다. 다마스쿠스는 한때 동서양 교역의 요충지로 번성했다. 그 밑바탕에는 종교와 문명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갈등을 없애고 평화를 지키라고 했던 살라딘의 염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최근에는 금지무기인 독가스를 반군 주둔지에 터트려 어린이 여성 등 수백 명을 학살한 아사드 독재정권의 본거지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지난 7일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에서 터진 화학무기로 인해 최소 40~100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다쳤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제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향해 “짐승 같은 짓에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또 어제는 “앞으로 24~48시간 내에 군사적 옵션을 포함한 중대 결정을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군 폭격기나 미사일에 의해 고도(古都)가 불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마스쿠스의 영묘(靈墓)에 잠들어 있는 살라딘이 통곡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