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국제칼럼] 국민청원 없는 세상 오기를 /염창현

청와대-국민 소통정책, 성과 만큼 부작용 속출…제도 개선책 마련으로 당초 도입 취지 살려야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훈련병 시절, 볼펜과 종이 한 장씩이 주어졌다. 그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불합리하다고 여겼거나 고쳤으면 하는 사항들이 있으면 적어라는 지시도 함께 하달됐다. 주위 눈치 볼 필요없이 소신껏 기록하라는 교관의 말이 참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훈련복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군 생리를 대충 파악한 동기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선임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신나게 백지를 메운다면 이후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시련도 엄청나리라는 것을.

군대는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사회다. 군의 특성상 필요악인 까닭이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위아래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조직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병사들의 불만을 듣고 해소한다는 ‘소원수리’라는 제도가 도입된 건 아마도 이런 폐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였을 법하다. 요즘은 군대가 모든 면에서 좋아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군 생활 개선점 가운데 하나로 ‘수박 겉 핥기식 소원수리’가 여전히 거론되는 것을 보면 아랫 사람의 목소리가 윗선까지 제대로 전달되기란 참 힘든 게 분명하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난 데는 청와대가 운영하는 국민청원 게시판이 한몫을 했다. 지난해 8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문구를 내걸고 시작할 때만 해도 오래 갈까 싶었다. 행여 생색만 내되 돌아오는 것은 없는 군대의 소원수리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제도는 예상외로 나름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그만큼 우리 국민이 표현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속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제도가 문재인 대통령의 여러 정책 중 비교적 잘한 것에 속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갖는 이유다.

국민청원 게시판을 보면 국민이 어디가 가렵다고 느끼는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청와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개설 때부터 지난달 초까지 올라온 16만 건의 글을 분석해봤더니 ‘아기’ ‘여성’ ‘학생’ 등과 같은 단어의 빈도수가 높았다. 하나같이 사회 약자라고 여겨지는 범주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사회 관심이 적은 데다 관련 법규도 미비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청와대가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청원 글에 따라붙는 추천 수 성향도 흥미롭다. 청와대가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하는 기준인 ‘추천 수 20만 건’을 넘은 청원의 주제는 ‘인권·성평등’ ‘안전·환경’ ‘문화·예술’ 순이다. 국민투표법 개정이나 소방관 처우개선, 민간기업 육아휴직 의무화 등은 추천 수가 20만 건을 넘기지 못했으나 많은 국민의 공감을 받았다. 청와대는 지금까지 미세먼지 대책 등 20여 건에 대해 답변을 했다. 물론 청와대가 회신을 했다고 해서 곧바로 대책이 나올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국민이 바라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 해결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은 사실이다.
볕이 좋으면 그늘도 짙다고 하더니 국민청원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부분도 적지 않다. 대입 수능을 앞두고 전국의 고3에게 치킨을 사달라, 일정한 신장이 되는 남녀만이 롱 패딩을 입도록 해달라는 등의 청원은 차라리 한 번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익명의 저술가가 쓴 문재인 대통령 폄훼 책을 국민이 읽어보길 권한다거나 5·18민주화항쟁 때 북한군이 개입한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등은 도를 넘어선 행태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해당 판사의 파면을 촉구하는 청원도 청와대의 권한을 벗어난 사례다.

얼마 전에는 인기 가수 수지 씨의 사형을 청원하는 글이 게재됐다가 파문이 일자 삭제되는 일도 발생했다. 글을 올린 이는 최근 유명 유튜버의 성 폭력 피해 청원을 공개지지했던 수지 씨로 인해 사건과 무관한 제3자가 피해를 입었다며 그 책임을 사형으로 물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했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접근과 이용이 가능한 공간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계급장을 떼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자’는 획기적인 시도일 수도 있다. 반면 일부이긴 하나 이런 기회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면 모처럼 마련된 공론의 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도 자명하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부조리가 모두 해소돼 청와대 국민청원이 아예 없어지는 때가 오는 게 가장 바람직할 터다. 하지만 이런 꿈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국민청원을 대하는 국민 의식의 변화가 우선이다. 차제에 청와대도 현재까지 불거진 문제점을 꼼꼼히 살펴 개선책을 내놓는 것이 옳다. 여기에는 실명제 도입, 타당성에 관계없이 추천 수가 많으면 무조건 답변을 하는 현행 방식을 바꾸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겠다. 정부와 국민이 소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내놓은 제도가 이런저런 이유로 얼룩져서는 아니 한 만 못한 꼴이 될 게 뻔하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

무료만화 &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