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외교에서 ‘정상(Summit)’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윈스턴 처칠이다. 그는 암울한 냉전시대였던 1950년 2월 소련 최고위층과의 만남을 제안하며 ‘정상에서의 회담’이라 표현했다. 처칠이 등산 용어인 정상을 어떤 계기로 인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에베레스트산 등정 도전이 화제를 모았고, 영국 신문에 그 말이 자주 나왔던 것과 연관 있어 보인다. 국제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저서 ‘정상회담’(2007년)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처칠이 말한 이후 ‘정상’은 미국으로 번졌다. 1955년 ‘타임’지가 동서 4개국 수뇌의 제네바 회담을 두고 그렇게 칭하면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1958년에는 뉴욕타임스 신문 연간 인덱스의 표제어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자 미 국무부는 정상을 아예 정식 외교용어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서로 맞서는 국가의 지도자가 만나 담판을 짓는 정상회담은 고대부터 시작될 만큼 역사가 길다. 현존 기록상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은 3000년 전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맺은 카데시 협정. 힘이 곧 정의로 통하는 그 시대에 무기가 아닌 대화로 평화를 이뤘으니 뜻이 깊다. 냉전이 치열하던 1959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 흐루쇼프와의 회담을 추진하며 “벼랑에서 만나는 것보다 정상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담판 중에는 미국 레이건-소련 고르바초프 회담이 유명하다. 둘은 1985~1988년 네 차례 담판 끝에 군비(軍備)축소에 합의했다. 첫 제네바 회동 때, 둘이 난롯가에 마주앉아 웃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장면은 준비됐다. 레이건은 양측 회의가 격앙되자 계획대로 고르바초프에게 산책을 제의하고 호숫가 오두막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말문이 트인 둘은 이후 회담의 숱한 진통 속에서도 상호 불신의 간극을 좁혀 나갔다.

‘세기의 담판’이라 불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게 됐다. 무산 위기를 딛고 성사된 터라 전망은 긍정적 분위기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방법과 체제 보장 등 여러 난제가 한꺼번에 다 풀릴지는 미지수다. 트럼프가 ‘두세 번 회담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해도 정상 간 만남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불신의 벽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지기는 어려워서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