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이 붕괴되기 2년 전인 1989년 10월 22일. 축구클럽 디나모 모스크바의 스타디움에서 특별한 경기가 열렸다. 디나모 팀과 ‘전 세계 베스트 11팀’과의 대결. 1971년 은퇴 때까지 이 팀에서만 22년을 뛰었던 한 위대한 선수의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경기였다. 공산주의가 여전했던 시대였지만 서방의 축구스타들은 모스크바 초대장에 기꺼이 응답했다. 보비 찰튼, 에우제비오, 베켄바우어 등 세계 축구사에 길이 남을 영웅들이다. 이들이 모스크바행 초대장에 기꺼이 응답한 것은 1950,60년대 세계 축구무대에서 그들의 슛을 끊임없이 막아내던 세계 최강 철벽 수문장에게 존경과 작별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1929~1990). ‘골키퍼 신’ 또는 ‘골신’으로 불리며 축구 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통하는 그는 당시 위암 말기에다 한쪽 다리까지 절단한 상태로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 후 야신은 오픈카에 올라 트랙을 돌며 관중과 세계 축구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고 베켄바우어 등 친구들과 일일이 포옹했다. 관중은 흐느꼈고 하늘에선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야신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
공식 경기 페널티킥 방어 150개를 비롯해 그의 대기록은 다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특히 한 시즌 27경기 6실점 및 22경기 무실점이라는 63년의 경이로운 기록은 세계 최고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 트로피를 그에게 안겼다. 골키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피파(FIFA)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94년 미국월드컵부터 최우수 골키퍼에게 ‘야신상(2010년부터 골든글러브상으로 변경)’을 수여하고 있다.
야신이 떠난 지 28년 만에 그의 조국에서 처음으로 월드컵이 열렸다. 특히 그의 고향 모스크바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러시아는 5-0 대승을 거뒀다. 무실점. 이와 관련해 “러시아월드컵 공식포스터를 장식한 ‘골키퍼 신’이 골문을 지켜줬다”는 한 누리꾼의 의견이 유독 눈에 띈다. 생전에 야신은 “볼을 잡으면 그대로 그라운드에 눕고 싶을 때가 많았지. 잔디 냄새가 너무 좋았거든”이라고 아내 발렌티나에게 털어놓곤 했다. “결코 보상을 생각하지 않았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을 뿐”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과 통한다. 갈수록 상업화되는 월드컵 무대에 오른 모든 선수가 야신의 ‘축구행복론’을 되새겨 봤으면 좋겠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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