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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세설사설] 노회찬의 죽음, 절벽을 넘어 다시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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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7-29 19:54:13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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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죽음 속에 지난 30년 걸어온 진보정당의 가시밭길이 압축돼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떠민 것은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나부터도 노회찬의 삶과 생각에 많은 대목 공명하면서도 ‘사표 방지’라는 미명 아래 그들을 표로 지지하는 데 인색했지 않나. 그들에게 단 한 푼의 정치후원금도 주지 않질 않았나.


다시 말을 되돌려보자. 소설가 최인훈이 꿈꾸었던 ‘광장’의 세계는 노회찬이 펼쳐 보이려던 세상과 다르지 않다. 최인훈이나 노회찬은 이념을 빌리지 않고도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역설적으로 이념의 잣대로 세상을 쟀거나 이념의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주 한 번도 뵙지는 못했을망정 마음에 품고 있던 두 분이, 그것도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한 분은 소설가 최인훈 선생, 또 한 분은 정치인 노회찬 선생. 존경하는 분의 부음은 늘 황망함을 안겨 주지만 이번에 느낀 아쉬움과 허전함은 특별했다.

향년 여든넷인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은 천수를 누린 셈이긴 하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그는 내겐 사숙(私淑)했던 여러 큰 작가 중의 한 분이었다. 고등학생 적 읽었던 ‘광장’이 준 놀라움은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유신시대 냉전주의에 기초한 맹목적 반공주의의 세례를 받던 내게 ‘광장’이 펼쳐 보인 세상은 충격적이었다. 그 소설은 해방과 6·25를 배경으로 분단된 남과 북의 체제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사상과 이념의 ‘밀실’에서 벗어나 ‘광장’을 지향하려던, 하지만 결국은 6·25 전쟁포로가 돼 남북한 체제를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몸을 던진 한 창백한 청년의 고뇌가 생생히 담겨 있지 않았던가.

후일 나는 그의 작품을 꾸준히 찾아 읽었다. ‘회색인’ ‘서유기’ ‘구운몽’ ‘태풍’ ‘총독의 소리’ ‘화두’ 같은 소설과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 같은 희곡집 말이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분단시대를 헤쳐 나가는 한 지식인의 단단하고 냉철한 현실 인식이 젊은 대학생에게 깊은 그늘을 드리웠던 거다.

최 선생의 부음은 아쉬움은 주었지만 회한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회찬의 부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진보 가치 실현에 평생을 매달려 온 한 정치인의 죽음은 ‘투신’이란 형식조차 충격적이어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주일 내내 울울한 심사 한 귀퉁이를 비집고 든 ‘분노’를 닮은 감정이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노회찬은 나보다 네 살 연상인데 대학을 늦게 들어간 까닭에 학번으론 한 해 선배다. 학교는 달랐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와 나의 청년 시절은 삶의 반경이 겹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부산 초량동 산동네에서 피란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교 때 서울로 진학했다고 들었다. 엄혹한 유신 시절 ‘고삐리’였던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학교에 몰래 살포했고 친구들과 독서회를 만들었다니 조숙하고 반항적(?)인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전두환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이후엔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고는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운동권’으로 불렸던 대학생들이 다투어 ‘위장취업’에 나섰을 무렵이다. 그는 경찰의 수배령이 내리자 7년간 지하활동을 했고 2년 반 동안 옥고도 치렀다. 그리고 1987년 6·10민주항쟁 이후엔 진보 정치에 몸을 담았다.

당시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그의 행적을 나도 풍편으로 어렴풋이 들은 적은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 그를 주목한 건 그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의 일일 테다. 민주화·노동운동 세력을 주축으로 한 진보운동이 의회주의로 수렴된 것엔 그의 역할이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엔 좌파혁명을 꿈꾸었던 동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테지만 진보운동도 결국은 합법의 틀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었다. 2011년 통합진보당이 이석기 등 친북세력의 손에 장악됐을 때도 단호히 결별하고 심상정 등과 함께 정의당을 창당하지 않았나.
노회찬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였다. “삼겹살도 50년 동안 같은 불판에 구워 먹으면 고기가 새카맣게 타버린다. 이제는 판을 갈아야 한다”는 명언(?)이 국민적 유행어가 된 것도 그때다. ‘44년 만의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 실현된 그 선거에서 그도 처음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그는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을 폭로했다가 되레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아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를 대중 정치인으로 만든 것은 진보적이면서도 친서민적 정치 행로였음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는 약자를 위한 법률을 가장 많이 발의하고 통과시킨 의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호주제 폐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복지법 개정,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개정,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 등 그가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했거나 발의했던 법안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와 서민 생계 보호를 위한 것들이었다. 어디 법안뿐이겠나. 세월호,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이런저런 파업 현장 등 그가 있었던 곳은 늘 서민과 약자들의 생존 현장인 것을.

글쎄, 쓰다 보니 노회찬의 연보 비슷하게 돼 버렸지만, 그는 막말이나 일삼고 어깨에 힘이나 주어 온 흔한 국회의원들과는 ‘별종’이었음은 확실하다. 진보운동을 하느라 고정된 수입을 얻지 못했던 그는 평생 돈에 쪼들리며 살았다. 지금까지도 전세 아파트에 살았다고 들었다. 막판에 ‘드루킹 일당’이 준 4000만 원이란 불법 정치자금의 덫에 걸리고 말았지만, 정치자금법에 따른 절차를 밟지 못했을 뿐 개인 용도에 쓴 것은 아니리라고 나는 믿는다.

노회찬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를 접한 순간 나는 9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말이다. 빌미가 된 사건의 경위나 죽음의 방식이 흡사했다. 글쎄, 그들 자신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노무현이나 서민과 약자의 대변자였던 노회찬이나 그들은 늘 가난하고 힘없는,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 편에 서 있지 않았던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택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수천 억을 해 먹고 감옥에 갔다 와서도 멀쩡한 얼굴로 졸개들을 거느리고 골프를 치러 다닌 어떤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노무현은 고향의 지인에게서 받은 수십억 원의 돈이 못내 부끄러웠던 거다. 결벽증에 가까웠던 노회찬도 수십 년 공적 생활 중 단 한 번의 판단 잘못으로 삶에 오점이 찍힌 중대한 사태(?)를 끝내 견뎌내지 못했던 거다. 수억, 수십 억씩 받아먹고도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주변의 동료 의원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들은 노회찬의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슴이 뜨끔했을까, 아니면 “그깟 4000만 원에 목숨을 내던지다니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하고 혀를 끌끌 찼을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노회찬이 죽음을 선택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터. 특검에 불려 다니고 재판을 받고 하는 동안 삶의 이력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물론 평생 노심초사 키워온 진보정당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으려는 뜻이었을 게다. 그렇게 보면 노회찬의 죽음 속에 지난 30년 걸어온 진보정당의 가시밭길이 압축돼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떠민 것은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나부터도 노회찬의 삶과 생각에 많은 대목 공명하면서도 ‘사표 방지’라는 미명 아래 그들을 표로 지지하는 데 인색했지 않나. 그들에게 단 한 푼의 정치후원금도 주지 않질 않았나.

어쨌거나 노무현과 노회찬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의 물결까지도 닮은꼴이다. 노무현의 무덤 앞에서, 그리고 노회찬의 영정 앞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문상객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힘들고 고단한 자기네 역성을 들어 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일 거다. 제 서러운 하소연에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일 거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노회찬이 죽어서야 비로소 그의 소중함을 깨달은 ‘지각생’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을 되돌려보자. 소설가 최인훈이 꿈꾸었던 ‘광장’의 세계는 노회찬이 펼쳐 보이려던 세상과 다르지 않다. 최인훈이나 노회찬은 이념을 빌리지 않고도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역설적으로 이념의 잣대로 세상을 쟀거나 이념의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노회찬이 죽은 다음 날, 어떤 방송의 저녁 뉴스에서 앵커는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구절을 빌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 책이라면 나도 가끔 인용하는 책이니,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들어 노회찬의 죽음을 기억하겠다. ‘정치는 자신의 신념을 돌처럼 던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노회찬이 바로 그런 노력을 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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