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치고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음력 7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답신에서 그 유명한 ‘무호남 무국가론’을 개진한다. 편지를 띄우기 17일 전인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아군이 왜적에 패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왜적이 물밀듯 호남으로 진격하려던 긴급상황이었다.

장군은 계획대로 수군 통제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해 왜적의 호남 침공 방비에 나선다.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그해 7월 15일 자 ‘난중일기’에 적은 장군의 시가 당시 사정의 엄중함과 칼날 같은 긴장감을 증언한다. 장군은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우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무호남 무국가론’은 임란 시절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서애집’에서도 볼 수 있다. ‘전라도가 없으면 다른 도가 있어도 나라는 끝내 의거하여 근본을 삼을 만한 계책이 없게 되니, 전라도야말로 왜적이 반드시 쟁취하려는 곳으로서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왜적이 군량미를 조달하려던 호남은 국방의 최후 보루였다.

하지만 이는 전략적 가치를 평가했을 때의 얘기일 뿐, 조선 8도 어느 하나 군사적으로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산대첩 행주대첩 등 숱한 임란 전투에서 보듯, 왜적을 무찌르는 데 남녀와 반상의 구별이 없었다는 점에서 ‘무백성 무국가론’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오늘날 탈신분제 민주사회에서는 굳이 말할 나위조차 없는 당위라고 하겠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성 중심적 성범죄 단죄에서 그 실상이 두드러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여비서 성폭력 사건을 담당한 1심 재판부가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에 대한 임면권을 위력으로 간주하면서도 그에 의한 성폭력 혐의는 인정하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시민단체들은 이를 두고 ‘한국여성 무국가론’을 제기한다. ‘무여성 무국가론’은 진리이다. 그런데도 정작 법적, 제도적 처우에선 여성이 소외돼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 속 전근대’의 표본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