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때인 2003년 10월,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저장대학교에 취재차 갔다. ‘분권시대의 지방대’ 시리즈 중 해외 우수사례의 하나로 그곳을 찾았다. 당시 인상 깊었던 것은 산학협력과 인재양성 시스템이었다. 저장대의 연구성과와 기술을 접목하는 학교기업 수가 200개에 이르고, 이들 업체의 연간 순이익이 엄청난 규모라는 점에 놀랐다. 신입생도 대부분 자기 권역에서 뽑았다. 전체적으로 대학이 지역산업 발전의 중심기능을 하는 구조였다.
비단 저장대만이 아니다.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지역과 밀착된 학교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칭화대는 교내 수백 개 첨단업체가 산학협력 활동을 하는 걸로 유명하다. 중국판 실리콘밸리인 중관춘이 획기적 성장을 이룬 바탕에도 칭화대가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신화를 일궈낸 것도 스탠퍼드 대학의 힘이다.
뜬금없이 외국 대학 얘기를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국가 균형 발전 정책과 관련되어서다. 정부는 지난달 개정 완료된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시행령’에 따라 세 가지 사업을 내놨다. 국가혁신클러스터 지정, 시·도별 지역혁신협의회 운영 등이 그것이다. 부산시도 그 협의회를 꾸렸다. 이들 정책의 키워드는 혁신체계 구축이다. 각 지역이 산업단지·대학 등을 연계하는 계획을 수립하거나 필요한 사업을 기획해 신청하면 정부가 심의·지원하는 게 골자다.
지역혁신체계는 지역 주도로 자립적 성장기반을 마련하는 방식을 말한다. 지방대와 자치단체, 기업, 시민사회단체 등 지역 주체들이 상호협력하며 지역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중심으로 논의된 새로운 지역발전 패러다임이다. 세계 각국은 벌써 이 전략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테크노폴,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등이 지역혁신체계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이런 혁신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참여정부에서는 지방대를 분권·균형발전과 지역 혁신역량 강화의 중심에 놓고 관련 정책을 폈다. 노무현 대통령도 기회 있을 때마다 지방대 육성의지를 나타냈다. 2003년 4월 국정과제회의를 주재할 때는 이렇게 강조했다. “기술혁신과 지방분권을 결합하기 위한 정부의 핵심 전략은 대학을 중심에 두는 겁니다. 저는 (지역발전의) 전략적 포인트를 대학에 두겠습니다. 대학 서열화 문제를 해소하고 연구개발 투자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도 지방대학을 육성해야 합니다.”
그에 비해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국가 균형 발전 비전과 전략에는 지방대 육성·지원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역인재·일자리 선순환 교육체계’ 정도가 지방대와 관련된 것이나 참여정부 때보다는 비중이 크게 떨어진 모양새다. 그런 데다 교육부의 대학기본역량 진단 평가는 지방대를 더욱 옥죄고 있다. 이번 평가에서 자율개선 대학에 뽑히지 못해 정원 감축 등의 제약을 받는 전국 40개 일반대 중 34개교(85%)가 지방대학이다. 이는 획일적 평가와 지역 특수성을 무시한 결과라는 비판이 높다. 물론 대학 구조개혁이 필요하지만, 자율과 시장원리에 맡기는 게 순리이지 정부가 강제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지역의 대다수는 혁신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럼에도 혁신의 견인차가 되어야 할 지방대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이래서는 지역혁신체계가 제대로 작용하기 어렵다. 참여정부가 지방대 육성과 혁신체계에 공을 들였음에도 그 성과가 미미했던 걸 감안하면 더 그렇다. 게다가 오늘날 지방대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신입생 채우기가 버겁고, 서열화된 대학구조로 인해 우수 학생을 유치하기도 힘들다. 인재의 수도권 유출도 지속되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역 내부의 힘으로 혁신과 산업 발전을 실현해 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지역혁신은 지방분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역에 자주 재원과 결정권을 주는 자치분권의 구조개혁이 있어야 지역 주도의 혁신도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방분권 개헌은 고사하고 재정분권도 ‘나 몰라라’ 하니 말이다. 지난달 ‘자치분권 종합계획’을 내놨으나, 지방세 확대나 재정 확충 등의 알맹이는 빠져 있으니 빛 좋은 개살구 격이다.
국가 균형 발전의 핵심 요소는 지역 대학을 키우는 일이다. 선진국의 사례들이 보여주듯 지역 특화산업 등과 연계해 지방대를 육성 지원하는 게 절실하다. 각 지역 수준에 맞는 대학을 육성해 성장을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혁신도시와 공공기관 지방 이전도 지방대를 포함한 혁신체계와 맞물려 돌아갈 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문 대통령의 공약처럼 전국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치분권과 아울러 지역혁신 정책이 올바로 서야 한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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