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때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는 조카 녀석을 태우고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조카가 갑자기 ‘아시안 하이웨이’가 뭔지를 묻는다. 부산으로 들어오는 경부고속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표지판을 본 모양이다. ‘AH 1’이라는 굵직한 알파벳 표기 아래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문구가 적혔으니 궁금하기도 했을 터다. 삼촌의 ‘폭넓은 상식’을 과시할 다시 없는 기회란 생각이 들어 서둘러 아시안 하이웨이 설명에 나섰다. 근데 예상과 달리 아는 게 별로 없어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얼른 궁지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인지라 대충 얼버무린 뒤 애써 말꼬리를 돌렸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아시안 하이웨이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은 혼자만의 일은 아닐 듯하다. 정부가 지난해 열린 아시안 하이웨이 당사국 실무그룹 회의에서 우리가 제안한 도로안전시설 설계기준을 관철시키는 등 이 사업과 관련해 주도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나 과연 성사가 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와 통하는 문을 꽁꽁 걸어 잠근 북한이 건재하는 이상 그곳을 가로지른다는 계획은 애초에 기대난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아시안 하이웨이가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잇단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망 개설이 가시화된 뒤부터다. 북한도 AH 1(도쿄-후쿠오카-부산-서울-평양-중국-베트남-태국-인도-파키스탄-이란-터키)과 AH 6(부산-강릉-원산-하산-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 노선 개통이 도로망 확충 및 기반시설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적극성을 띠고 있다니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부산은 아시안 하이웨이의 8개 주요 노선 가운데 우리나라가 관여하는 2개에서 모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남북 간 철도망이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중국 횡단철도(TCR)로 이어질 경우 출발지가 될 것이 유력한 부산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진다.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북 경제협력이 부산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안으로 눈을 돌리면 낙관은 이르다. 특히 부산이 지역 차원에서 얼마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가로 범위를 좁히면 그렇다는 답을 받아내기는 힘들다. 지역 상공계만 해도 지난달 기업인과 전문가로 구성된 ‘남북경협특별위원회’를 조만간 발족시키겠다는 원칙만 밝힌 상태다.

시의 대응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시는 1차 정상회담이 끝난 지 한 달 뒤인 5월 ‘수산분야 남북교류협력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부산발 유럽행 유라시아 철도운행, 남한·북한·중국·러시아를 잇는 육·해상 복합물류루트 활성화, 항만·조선 분야 남북협력 네트워크 구축 등 5개 분야에서 35개 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안도 아직 구상 단계에 머물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정부의 남북경협 과정에서 부산이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열린 3차 정상회담 때는 대기업 총수와 재계 인사가 대거 동반했지만 지역 경제계에서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회담이 남북경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중앙 인사 위주의 방북단 구성이 납득 불가능한 게 아니지만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산의 배제는 아쉬운 부분임이 분명했다. 부산으로서는 오거돈 시장이 지난 4일 평양에서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11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게 됐다.

오 시장은 방북에 앞서 내놓은 성명에서 “남북 두 정상이 닦아 놓은 평화의 큰 길을 지방정부 차원에서 더 넓히고, 활발한 남북교류를 꽃피우기 위해”라고 평양 방문 목적을 시민에게 알렸다. 이런 의도가 현실화되려면 당연히 시의 선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각 지자체는 남북경협 활용을 위한 방안을 앞다퉈 추진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동계 아시안게임 남북 공동 개최(강원도)처럼 실현이 유력해 보이는 계획도 꽤 된다. 지난 8월 평양과의 교류협력사업을 총괄하는 ‘남북협력추진단’을 출범시켰던 서울은 최근 개성공업지구에 입주하는 기업의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한 조례까지 만들었다.

시는 남북경협 시작이 눈앞에 다가온 만큼 실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 시급한 과제는 지역 상공계,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그러려면 각계의 의견 수렴과 조율, 집행이 가능한 단일 기구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중구난방식 방안이 나온다면 북한과 접촉 이전에 중앙정부 설득조차 어려워진다. 남북경협은 제대로 된 대비책이 없으면 남의 밥상에 차려진 음식일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 부산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때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