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비집고 얼굴을 내비친 햇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에 내려앉아 은빛 물결로 출렁인다. 코스모스는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들녘에 고개 숙인 벼 이삭은 황금빛이 되었다. 흰 구름이 떼를 지어 파란 하늘에 새처럼 날아 내 앞에 머문 순간 먼 옛날 초등학교 교정의 가을이 머릿속을 스친다. 가을엔 운동회 준비로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따가운 햇볕도 늘 함께했다. 눈은 부셨지만 흰 구름이 햇볕을 가려주면 맑고 파란 하늘을 오래 볼 수 있었다.
교정의 남쪽 운동장가엔 플라타너스가 있었고, 그 그늘은 강렬한 햇볕을 막아주는 피난처였다. 여름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운동회 준비로 4교시 이후엔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지냈다. 조그만 초등학교였지만 300명이 훌쩍 넘었다. 연습은 햇볕이 따갑게 내리쬘 때 시작해서 해가 앞산에 기울 무렵 끝났다.

허기도 밀려오고 반복되는 연습은 싫증도 났다. 운동회 날이 가까워질수록 연습시간은 늘어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날도 있었다. 행진곡에 따라 친구와 발맞추어 용진문을 지나 개선문을 통과하는 행진부터 6명이 한 조가 되어 50m 달리기와 청군과 백군 에서 선발된 선수들의 릴레이 달리기까지 호기심 유발의 경기가 중간중간 이어졌다.

남자애들만 참가하는 전투 같은 나무 봉 넘어뜨리기와 기마전이 진행될 땐, 여자애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시골 아이의 나무 오르는 능력이 원숭이를 능가할 정도니 세워진 나무 봉의 방어는 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기마가 된 아이 양쪽 어깨에 두른 팔과 등에 업힌 기마전에 기수가 무거울 땐 경기도 전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서로 얼굴을 보며 민망해하기도 했다. 가끔 다치는 친구도 있었고, 자기편이 이겼다는 재미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꾀만 늘었다. 그렇지만 그만둘 수도 없었다.

북한의 능라도 5·1경기장의 집단체조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더욱 힘에 부쳤던 것은 텀블링이란 짝 체조였다. 힘이 소진될 무렵, 짝 체조는 어깨에 올라간 또래가 팔을 펴 올렸다 내려야 끝났다. 이렇게 처음엔 둘이 그리고 셋이 점점 인원은 늘려 3층 4층까지 사람 탑을 쌓아 올렸다. 덩치는 컸지만 밑에 깔린 친구들은 죽을 맛이었다. 무릎을 꿇고 둥글게 맨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친구들에게 등을 내주고 원통 모양의 2층 3층 쌓아 올려 맨 마지막 4층의 한 친구 체조가 끝날 때까지 견뎌야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위에 올라간 친구가 무너지면 자기도 무사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얼굴은 벌겋게 끙끙거리며 참아야 했다. 맨 위로 올라간 아이는 떨어지면 크게 다칠 처지로 늘 공포감에 떨었다. 때로는 힘에 부쳐 밑에 있던 친구들의 키득키득 장난기와 집중력 저하로 위에 있던 아이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처음엔 무릎과 팔에 입은 상처로 피도 흘렸다. 시간은 지나 짝 체조에 익숙했고 조금씩 적응해갔다.

운동회는 주로 추석 다음 날 열렸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객지의 친척들이 운동회의 중요한 손님이 되었다. 그래서 크게만 느껴졌던 운동장엔 사람들로 가득했고, 머리 위엔 종이로 만든 만국기는 파란 하늘에 펄럭였다. 스피커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간간이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화약 총소리는 긴장감을 높였고, 아이들이 던진 콩주머니로 터진 바구니는 점심시간을 알렸다. 어떻게 알고 몰려들었는지 풍선장수, 엿장수, 구슬장수, 화약 딱총장수도 좌판을 벌여 운동회 분위기를 북돋웠다. 보따리장수가 펼쳐 놓은 장난감은 부모와 객지의 친척에게 받았을 주머니 속 아이들 용돈도 내놓게 하기에 충분했다.

모여든 구경꾼은 우리가 준비한 경기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때로는 그들이 직접 경기에 참여도 하였다. 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향의 텅 빈 교정 운동장엔 잡초만 무성한데 언제 다시 아이들 함성을 들을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