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25세의 젊은이 데니스 텐이 자신의 차량 후방 거울을 훔치려던 괴한 두 명과 몸싸움을 벌이다 흉기에 찔려 숨졌다. 타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카자흐스탄의 유명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면서 한민족 동포인 고려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데니스 텐은 대한제국 시절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의병장 민긍호 선생의 외고손자로 밝혀졌다.

데니스 텐과 같은 고려인은 러시아를 비롯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에 수십만 명이 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한민족이 러시아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때는 조선 철종 14년인 1863년이다. 그해에 10여 세대가 농업이민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해마다 이주민이 늘어났다.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로 건너 가는 우국지사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전역에 퍼져 있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터전을 옮긴 이유는 독재자 스탈린의 소수민족 억압 정책 때문이다. 1937년 스탈린은 17만5000여 명의 고려인을 기후가 혹독하고 농지마저 턱없이 부족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려놓았다. 초기 정착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을 내세워 소수 민족 사이에서 가장 잘사는 집단이 됐다.

한동안 우리 사회와 거리가 멀었던 고려인은 1990년 한·러시아 수교를 계기로 비로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거주지역에 한국 문화시설이 잇달아 들어섰고 민간 교류도 활발해졌다. 2007년부터 정부가 취업비자를 발급함에 따라 한국으로 들어오는 고려인 숫자도 늘어났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과 달리 우리말에 능통하지 못한 데다 모국에서도 차별이 심해 제대로 자리 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지난 20일 경남 김해시 한 원룸에서 발생한 화재로 열세 살과 네 살인 고려인 3세 남매가 목숨을 잃었다. 우즈베키스탄 국적인 이들은 한국에서 일하려는 30대 부모를 따라 왔다가 변을 당했다. 남매 가족 7명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비좁은 공간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가 고려인 처우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 같은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세상이 올 거라 꿈꾸던 할아버지 땅에서 세상을 떠난 어린 남매의 죽음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