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드득뿌드득 따닥따닥, 뿌드득뿌드득 따닥따닥.”

주머니에서 호두 두 알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만지작거리다, 이따금 손때 묻어 맨들맨들 거무튀튀하게 변해 버린 호두를 꺼내 호두의 고소한 향내를 맡던 기억이 난다. 돌멩이로 톡 치면 딱 소리를 내며 박이 벌어지듯 두 갈래로 쪼개지기도 하고 조골조골 주름 사이로 부서지기도 하지만, 두 갈래로 얇게 파인 홈을 따라 정확히 돌을 내려치면 대개는 두 쪽으로 쪼개지는 호두. 망치로 깰 때가 더 잘 깨지지만 조금만 힘을 세게 주면 호두는 산산조각이 나고, 그렇게 되면 노란 우윳빛을 내는 미끄덩한 호두 속은 껍질에 짓이겨져 가려먹기가 어렵게 된다.

두 갈래로 잘 깨어졌나 싶지만 호두 속은 왜 이리 미로 같은지 호두 속을 에워싸고 있는 껍질이 딱딱하면 호두 속을 끄집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또다시 두 갈래 세 갈래로 깨 내야 한다. 그것도 적당한 힘으로 깨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새 호두는 박살이 나고 만다. 미로 같은 호두 속을 보면 호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골프공만 한 초록빛 과육에 싸여 있던 호두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다. 어찌 저렇게 동그란 갑옷 속에 미로 같은 방이 있을까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복잡 미묘하고 알 수 없는 일을 “호두 속 같다”고 했나 보다.

호두나무만 보면 나는 청설모가 연상되곤 한다. 언젠가 탐스러운 호두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커다란 호두나무 밑을 지나갈 때 팔뚝만 한 가지에 앉아 아직 덜 익어 여물지 않은 호두를 과육부터 시작해서 호두 속까지 갉아먹고 있던 청설모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앞발로 호두를 집고 툭 튀어나온 기다란 앞 이빨로 과육을 벗기면서 호두 속을 파먹던 청설모가 어찌나 귀여웠던지. 청설모는 잣나무에만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던 내게 청설모가 호두를 까먹는다는 것은 색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호두와 잣은 친구 사이라서 그럴까. 수정과에도, 단술에도, 약식에도, 달콤한 아이스크림 케이크에도, 어느 음식에서나 함께 들어가는 재료라서 그럴까. 잣이 한창 익어 갈 즈음 쉿쉿 휫휫 소리를 내며 거뭇거뭇한 털이 북슬북슬 긴 꼬리를 치켜세우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렵하게 넘어 다니는 청설모만 보아 왔던 터라 호두나무에서 뛰어 노는 청설모는 실로 의외였다. 그렇지만 호두나무에 기어올라 호두를 까먹던 청설모는 광덕사에서도 보았고 수원 융건릉(隆健陵)에서도 보았다.

어렸을 때 나는 찬장 깊숙이 숨겨 놓은 호두를 찾으려고 찬장에 의자를 기대 놓고 올라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의자와 함께 넘어지면서 찬장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사발이니 사기그릇을 몽땅 깨 먹었다. 물론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호되게 맞았던 것도 당연했다. 문득 그 기억이 난다. 그래도 호두를 몰래 꺼내 주머니에 넣고는 몇날 며칠을 만지작거리다가 배가 고파 담벼락 밑에서 돌로 깨 먹던 기억 속의 호두 맛이란. 텁텁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온종일 입안에 남아 호두를 더 먹으려고 찬장을 뒤졌지만 어머니께서는 호두를 언제 다른 곳으로 숨기셨는지 찾을 수 없었던 어린 날의 기억. 그런 호두는 대보름이나 되어야 부럼 깬다고 몇 알 손에 쥐어 볼 수 있었다.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호두를 오늘은 어머니께서 양파 망태기에 한 가득 가져오셨다. 웬 호두냐고 여쭈니, 시골에 갔다가 외할머니께서 마당에 있는 호두나무에서 손수 따서 주셨다는 것이다. 올해는 작황이 좋아 몇 가마를 수확했다는 말씀과 함께. 예전 같았으면 겨우 한두 개 손에 쥐어 볼 수 있었던 호두가 지금 내 앞에 망태기로 한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호두나무 농사를 짓지 않고서야 대보름 시장에서나 멍석, 광주리에 가득 담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갑작스러운 풍요로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호두 한 개를 먹으려고 찬장을 뒤지던 어렸을 적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어렸을 때 호두 한개 먹으려고 찬장을 뒤지다 깨 먹은 그릇 때문에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맞았던 이야기를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어머니께서는 한술 더 떠 “그때 맞았던 종아리가 아팠지!” 하시며 다 큰 나의 종아리를 매만지셨다. 그리고는 형제대로 골고루 호두를 나누어 주셨다.

호두 몇 알을 찬장에 넣어 두었다. 아내는 무엇 하러 그러느냐고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 맛보았던 텁텁하고 고소한 그 호두 맛. 매 맞아 가면서 찾아낸 호두 한 알을 애지중지했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문득 호두 생각이 나면 나는 어렸을 때 찾았던 호두를 찾기라도 하듯 찬장을 뒤적거릴 것이다. 그리곤 그렇게 찾은 호두를 주머니에 넣고 며칠이고 만지작거릴 것이다. 고소한 냄새가 내 손에 배어 지워지지 않을 때까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