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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어떤 기다림 /조갑룡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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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11-05 19:09:18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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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를 하다가 그룹 ‘이글스(Eagles)’의 음반을 책장 구석에서 발견했다. 기다림을 만지작거리며 설렜던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방문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다. 공항 매점을 지나가는데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그룹 이글스의 2004년 호주 멜버른 공연실황 DVD가 눈에 확 들어왔다. ‘호텔 캘리포니아’와 ‘데스페라도’ 등 귀에 쟁쟁한 30여 곡이 들어 있었다.

당장 틀어볼 형편이 되질 않아, 아니 꼭 보려면 볼 수도 있었지만 귀국할 때까지 참기로 했다. 설렘을 즐기기 위한 의도적인 기다림이라고나 할까.‘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보컬을 맡은 드럼주자 돈 헨리의 사막처럼 건조한 허스키의 호소력과 글렌 프레이와 조 월시가 서로 얼씨구 주고받는 기타 애드리브 연주 무대를 상상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농밀한 삶의 재미 그 자체였다.

내년 2월 초에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새로운 기다림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3개월여의 이 기다림은 단순히 누군가와의 만남이나 원하는 결과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 시간 만들기’를 통해 내 이야기를 익혀내는 과정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을 들인다는 말이다. 발효음식이라는 훌륭한 음식문화를 보유한 우리 조상들은 천천히 시간을 기다렸을 때의 음식에서 나오는 깊은 맛을 알고 있었다. 우리 안에 자라는 것들을 돌보고 숙성시키는 시간을 기다림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기차역에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 후에나 온다. 시계를 들여다보고 하릴없이 길가의 나무를 세면서 권태롭게 기차를 기다린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5분이 지났다. 역 건물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거닌다. 그러다가 문득,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글이다. 시간 죽이기(killing time)는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기다림 없이 태어나는 것들은 죽은 채로 살거나 태어나지 못한 채로 죽는다. 그래서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삶의 온기가 없다.
희망 기대 바람 기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떤 막연함으로 시간을 견디는 힘, ‘기다림’이라는 단어의 울림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실적인 기다림에서부터 내일은 좀 더 나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다림까지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때로는 기다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을 낮출 수 있고 이루어진 일로 희망을 배운다. 기다림은 ‘확실히 살아 있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식 열을 낳아 여섯을 핏덩이로 가슴에 묻고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신 우리 외할머니, 6·25전쟁 당시 군에 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며 언제나 집 밖에 호롱불을 걸어놓으셨다. 어두우면 집을 잘못 찾을까 봐. 행방불명 통지서를 받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하루도 빠짐 없이 기다린 외할머니.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일어나 골방에서 담뱃대를 물으셨다. 빨면 밝아지는 담뱃불도 호롱불이었으리. 외할머니는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셨다. 기다림 안에서 어떻게 머무르며, 기다림이란 이런 것이라는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셨다. 36년 전, 아흔세 살에 이틀 편찮으시다가 그대로 그렇게 영면하셨다. 30여 년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오로지 호롱불과 함께 기다림에 대한 순종으로 천수를 누리셨다. 무위자연의 어떤 기다림이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가 삶을 고속화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기다림에 취약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맥락 있는 사고와 판단은 뒷전이고 스펙이나 효율성의 기준에서 우리의 삶을 방향이 아닌 속력으로 재단한다. 순간의 기다림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 삶의 양식, 머무름과 기다림을 팽개치면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하는 삶은 세상을 황폐화시킨다.

기다림을 멈추는 순간 삶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기다림은 삶의 내공이 자라고 깊어지는 위대한 영긂의 몸짓이자 삶을 지탱해주는 간절한 버팀목이다. 스스로를 기다림의 벼랑 끝에 세워 자기 안의 손조차 대지 않았던 가능성을 끌어 올리려는 의도적인 노력, 때로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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