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지리산 자락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사람들은 먼 거리라고 하지만 주말마다 두 시간 거리를 먼 줄 모르고 달려간다. 그때 기분은 숨겨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렌다. 일주일 새 또 어떤 꽃들이 피고 졌는지, 텃밭에 심은 무는 얼마나 더 자랐는지, 감나무에 붉게 매달린 까치밥은 아직 남아 있는지, 이번엔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나를 노동으로 지치게 할 것인지. 나는 날마다 그곳에서 눈부신 아침을 맞고 즐거운 노동으로 하루를 보낸 후 보석 같은 별빛을 바라보다 잠들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그곳에 정착할 처지가 되지 못해서 몹시 안타깝다.

내가 그토록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적 기억 속에 있는 자연과 사람과 공기를 느낄 수 있어서다. 나는 산청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생생하고 풍성해져 결국 그 근처에 집을 마련한 셈이다. 어릴 때는 혼자 계신 할머니를 뵈러 아버지 손을 잡고 자주 드나들었고, 입학해서는 중 1때까지의 방학을 거의 그곳에서 보냈다.

고향에는 어린 마음을 가차 없이 흔들어버리는 서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산은 깊고 높았고, 들은 끝 간 데 없이 푸른 물결로 출렁이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었다. 그 들판에 군데군데 웅크리고 앉은 볏가리에 겨울이면 서리가 앉고 눈이 하얗게 내렸다. 달빛이 환한 밤에 바라보는 눈 쌓인 산골 풍경은 신비함을 간직한 채 어린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덕천강이 흘렀다. 강은 여름날, 아이들의 환상적인 놀이터였다. 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강가에서 까맣게 그을려가며 시골아이들과 물장구치고 놀았다. 겨울이면 할머니 댁 앞의, 물이 꽁꽁 언 못에서 썰매를 타거나 아이들을 따라 토끼몰이를 하러 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어디 내 고향뿐이었을까. 그 무렵 대부분의 산골이 그랬을 것이다. 지금 태어났다면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그 시절에는 당연하게 누렸다. 자연도, 사람도 마냥 순하고 푸근해서 언제 달려가도 편했고, 떠나오면 그리웠다.

시골아이들은 도시아이에게 별 말 없이 다정했다. 아침이면 우르르 몰려 할머니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서도 내 이름을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나같이 그을린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띠고 내가 나와 주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뭘 하자는 것인지는 눈빛과 행동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기억들이 몸 깊은 곳에 스며 있었던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한 겹 베일 뒤의 등불처럼 떠오르곤 했다.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내선지 나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유난히 깊다. 그래서 내가 사는 아파트는 늘 산을 끼고 있다. 집을 나서서 몇 발짝만 가면 바로 자연의 향기를 마실 수 있는 곳에 산다. 그 덕에 내 아이들도 초등학교 때는 뒷산을 오르내리며 자랐다. 그 속에서 계절마다 자연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개구리는 언제부터 울고, 올챙이와 도롱뇽 알은 어떻게 부화해 성체가 되어가는지, 장끼와 까투리가 어떻게 다른지, 다람쥐와 청설모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저절로 체득했다. 요즘 같으면 혼비백산해서 말릴 일이지만 그때는 아이들끼리 뒷산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레 자연을 익힐 수가 있었다. 지금도 성인이 된 아이들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자연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뒷산이 참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어른도, 아이도 대부분 높은 빌딩 속에서 답답하게 살아간다. 아침마다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 아침햇살은 얼마나 찬란하게 퍼지는지 관심이 없다. 그 사이에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수없이 보고 듣는다. 아이들을 볼모로 잡은 유치원 원장들의 등등한 기세에 눈치를 봐야 할 수도 있고, 돈과 권력을 믿고 사람을 마구 패는 사장 아래 피눈물을 삼켜야 할 수도 있다. 도저히 보고 싶지 않은 꼴들을 뉴스로 수없이 접하다가 아주 운 나쁘면 길 가다가 낯 모르는 이의 돌발적 분노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날마다 이 불편하고 불결하고 부당한 세상에 울화통이 터지고 침을 뱉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제쳐두고 아이들 손을 잡고, 혹은 부부끼리 손잡고 자연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때는 식탁에서도 놓지 않던 휴대전화일랑 모두 던져버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자연의 속삭임을 들어야 한다.

어른도, 아이도 자연 속에서 흙을 밟으며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듣다 보면, 내 발 아래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마음에 서정이 깃들면서 고요가 찾아온다. 그 고요 속에 날마다 불안이 더해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지금 할 일이 무엇인지 답을 찾는 길이 숨어 있다. 그 길이 이 시대에 내 생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