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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엄앵란의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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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은 지난 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신성일보다 한 살 연상이다. 스물한 살이던 1956년 ‘단종애사’로 영화계에 데뷔, 신성일보다 4년 먼저 청춘스타로 떴다. 당시로는 드물게 대학(숙명여대 가정학과)을 졸업한 그녀에겐 대한민국 1호 여자 학사배우라는 수식어가 지금도 따라다닌다. 어머니는 영화배우, 삼촌도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다. 똑똑하고 예쁜 이 장녀는 집안의 기둥이었다고 신성일은 훗날 회고했다.

   
두 사람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나 4년 뒤 ‘맨발의 청춘’을 찍고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그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연예인 집안의 연예인 며느리를 반기지 않았던 대구 보수집안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가정부 5명인 시댁에서 먹고 자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노라 고백한 적이 있다. 배우로 전성기였지만 결혼은 곧 은퇴였다. 그녀는 내리 3남매를 낳고 평범한 아낙이 되었다.

엄앵란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다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각종 TV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면서부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KBS ‘아침마당’ 패널 때였다. 후덕한 모습으로 브라운관에 나온 그녀는 부부문제 고부갈등 상담을 주로 맡았다. ‘원조 꽃미남’ 남편의 끊임없는 염문,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옥고까지 치른 남편의 뒷바라지 등 그녀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쫀득하고 날카로운 조언에 무릎을 쳤다. 하지만 엄앵란의 결론은 대부분 “웬만하면 참고 사세요” 였다.

남편은 칠십줄에 들어서도 ‘혜화동 여인’과의 첫사랑, 선배 여배우의 여관방 유혹, 아나운서 출신 연극배우와의 밀회 등을 언급하고 “지금도 애인이 있노라”고 자랑스럽게 세상에 털어놓았다. 연애편력이 남자들 간 생존경쟁에서의 전리품인 양 떠드는 신성일도 이상했지만, 결혼 생활 대부분을 별거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남편을 욕하면서도 이혼 도장만은 찍지 않았던 엄앵란 역시 젊은 사람들에겐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법했다.
지난 6일 무척 쇠잔해진 모습으로 남편의 발인장에 들어선 그녀는 “아내한테 잘하라”고 한마디했다. 주변 사람에게 한 말인지 이제 떠나 보내는 남편에게 한 말인지 모른다. 그녀가 짚고 선 지팡이가 너무 잘난 남성을 남편으로 둔 그 세대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함께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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