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렸으나 상당한 관객을 끌어 모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몇몇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을 듯하다. 특히 비리 공무원으로 열연한 배우 최민식이 사투리로 내뱉은 “니, 내가 누군 줄 아냐? 너그 서장 남천동 살제?”라는 대사는 지금도 방송매체의 오락 프로그램 등에서 심심치 않게 인용된다.

이 영화에서 최민식은 경찰서에 끌려가자 서장과의 친분을 드러내며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 더 황당한 것은 최민식의 호통에 일선 수사관들이 쩔쩔매는 모습이다. 물론 영화 속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실제 경찰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최민식의 연기에 관객들이 일정 부분 공감을 한 것은 이 같은 허풍이 어디에선가는 아직도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터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영화 속에서나 들을 법했던 최민식 대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유명 회사 운영자들이 직원을 상대로 듣기조차 거북한 상소리를 하는 사례는 하도 많이 들은 터라 이제는 특별한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남들 보기에 평범한 서민들조차도 아파트 경비원에게 “개가 주인을 몰라본다” “종놈이 감히…”라는 표현을 써가며 행패를 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화점 등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들은 사소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아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며 갑질을 하는 ‘진상 고객’ 때문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구급대원들은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나를 몰라 봐” “나보다 어린 녀석이” 등이라고 하소연한다. 최근에는 청와대 대통령경호처 소속 5급 공무원이 술에 취해 시민을 때린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내가 누군 줄 아느냐”며 폭행까지 저질렀다.

전문가들은 지나친 과시욕구가 수반된 이런 행동에 대해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남보다 특별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나 이게 도를 넘어서면 정신질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사회적·법적 처벌이 뒤따르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이 반복될 위험성도 높아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자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도대체 다른 사람이 왜 알아야 하느냐고.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