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여 년 전, 영국 신문 타임스와 간호사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실상을 폭로했다. 영국 내각은 이 사실을 반박하면서 은폐했지만 결국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 당시 자료를 찾아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 필자에 의해 ‘펜의 힘’으로 번역되어 지난 5월 출간되었다. 책은 1974년 8월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한 특별검사의 보고서에 나오는 다음의 말로 시작한다. “공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않고, 시민들이 이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존속되지 않는다는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명제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가장 빠르게 이룬,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다. 경제 성장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경영자, 뛰어난 공직자와 우수한 근로자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민주화는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않은 공직자를 감시한 시민의 힘에 의해 이뤄졌다.

나는 1977년에 대학을 입학했다. 유신정권 말기였던 당시 대학에선 민주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대학 3학년이던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도서관 앞에 유신정권 타도라는 전단이 뿌려지면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수백 명, 수천 명으로 불어난 학생은 시위 대오를 형성하고 이내 교문을 박차고 가두로 진출했다. 무슨 뚜렷한 정치적 이념에 따르기보다는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반발로 참여했던 필자도 대오에 포함되어 국제시장까지 갔다.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게 되니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겁에 질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어진 최루탄 발사, 전경과의 육탄전 속에서 필자는 쫓기게 되었고, 다행히 시장 상인들의 도움으로 점포에 숨었다가 어두워지고서야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내가 처음 경험해본 민주화 시위다.

이튿날 동아대 학생들과 시민이 동참하고, 이어 마산으로 항쟁이 확대되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역사는 이를 10·16부마민주항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부산대 정문은 공수부대와 장갑차가 점령했고 휴교령과 함께 철문은 굳게 닫혔다. 필자는 시골 고향으로 갔다. 며칠 후 최고 권력자가 부하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부산대 학생들의 첫 시위가 발생한 10월 16일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엄혹했던 유신체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10·16 부마민주항쟁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필자와 같은 77학번이었다. 이후 나는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지만, 그들은 줄곧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면서 옥살이와 함께 많은 고생을 했다.

세월이 흘렀다. 2015년 8월 17일, 부산대 고현철 교수가 총장직선제를 외치며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대학 자율화와 민주화의 정당성에 관한 유서를 남겼다. 부산대는 교육공무원법 규정에 따라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하였고, 필자가 당선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총장직선제’가 대학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령은 직선제를 하도록 해놓고 여러 가지 규제를 통해 직선제를 못 하게 하며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교육자가 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이율배반적인 논리이기 때문이다.

총장 당선 이후 고 고현철 교수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을 교내에 세웠다. 학생들에게 민주정신을 본받게 하고 싶었다. 또 부산대 총장으로는 처음으로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했고, 부산대 자체적으로 기념전시회와 영화제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고인이 되었거나 제적당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여 작은 감사와 위로도 했다. 부족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나쁜 역사를 기억하며 좋은 역사를 만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10·16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뿌리’다. 그런데도 부마민주항쟁만이 유일하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10·16 민주항쟁을 기억할 변변한 기념관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반면 부마항쟁 이듬해인 1980년에 발발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기념일 지정은 물론 기념관이 있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내년이면 부마민주항쟁이 40주년이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다. 위대한 부마민주항쟁의 기억이 있는 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잘못된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 거대한 민주화 역사의 물줄기를 결정적으로 틀었던 부마민주항쟁, 그 역사적 장소에 10·16기념관을 건립하고 후세를 교육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건강한 민주시민이야말로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않는 공직자’를 견제할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부산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