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언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다. 읍내에 사는 친구가 우리 동네를 두고 ‘촌’에 놀러 갈까 물었다. 마산에서 고교를 다닐 땐 터널 하나 지나면 진해시인데 친구들은 ‘진촌’이라 불렀다. 대학 땐 방학을 맞아 서울 친구가 ‘촌’에 안 가느냐고 관심을 표했다.

도긴개긴의 부산을 핀테크 금융운영도시로 지정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노약해가는 제2도시의 반딧불 같은 기대가 나라 전체를 밝힐 등대로 우뚝 설 장면을 그리며, 또 다른 아전인수 격인 ‘촌’시리즈가 살아난다.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유학 시절 대형 중국지도를 구해 기숙사 벽에 붙였다. 한 마리 수탉 형상의 중국에 모이주머니같이 한반도가 달랑 붙어 있었다. 경상도 전라도가 무의미했다. 이번에는 딸아이가 부모를 따라 중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고교를 다녔다. 딸은 홍콩과 대만의 자본주의 중화권 친구들의 유연한 사고를 보면서 사회주의 세뇌교육에 더 물들지 않은 게 다행이라 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세상은 착시로 보이지 않던가. 나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통탄한 것은 첫 유럽여행 때였다. 독일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의 고성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파손될 때마다 부분 보수를 해 시대별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성당은 무려 175년에 걸쳐 완공됐다 한다. 재건축을 하겠다고 30년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가 아닌가. 고대 동양에서 산을 옮겼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한 세대를 30년으로 봐도 기껏 100년에 불과한 시간이다.

김해공항이 초라하게 생각된 건 최근 다시 유럽에서 귀국하면서였다. 루브르박물관과 영국 왕실의 기마행진에 지금도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상하이를 경유하며 푸둥공항의 자기부상열차의 차창에 비친 제2도시의 마천루는 장관이었다. 만리장성과 서안의 관광거리는 말할 게 있겠는가. 다른 나라의 먹거리와 발전을 보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현실이 저려왔다. 김해공항은 30년 전 사회초년생으로 부모님을 제주도로 모실 때와 비교해 별로 나아진 게 없지 않은가.

한의학 원론에 따르면 사람은 작은 우주이고 한 국가의 형상은 사람을 닮았다. 제어할 수 있는 하부의 기혈이 약하면 그 뜨거운 기운이 상부를 통해 머리로 몰린다. 그 혈이 걸쭉하여 뇌혈관이 막히고 더러는 감당하지 못한 혈관이 터져 사람이 쓰러지는 것이다. 수도권에만 투자와 관심이 편중되는 현실 앞에 나라의 중풍이 우려된다. 뉴욕 상하이 오사카 등 제2도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나라들이 새삼 우러러 보인다. 부산의 지리적, 역사적 자원을 두고도 망연자실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두고 손실이다.

우리나라의 급성장기에는 부산이 주역을 맡았다. 수출품들이 부산항에서 출항하기 위해선 화물차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은 또 바다의 도시다. 그것도 남해와 동해가 양수겹장으로 오륙도에서 만난다. 부산은 기온이 온난한 휴양의 도시다. 싱가포르와 홍콩, 상하이에 뒤질 게 없다. 2009년 서울과 함께 금융중심도시로 지정된 부산이 아닌가. 명실상부한 국제금융도시로 자리매김하려면 추가 금융공공기관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4차 금융산업의 블록체인특구로 지정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부산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피란수도’의 보물들이 산재해 있다. 새 정부의 우선가치인 평화를 꽃피울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은 일찌감치 남구에 터를 잡고 있다. 지난 11일은 온 세계가 부산을 향한 날이다. 7년째 진행된 ‘턴투워드 부산’이 일개 참전 캐나다인의 호루라기소리에서 세계를 울리는 천둥소리로 커지고 있다. 거기다 세계인이 가보고 싶은 도시로 부산이 선정됐다. 집안의 꽃소식을 언제까지 바깥에 의지해 들을 것인가.

부산이 국제무대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한 외국인의 지적을 흘려버릴 수가 없다. 언어와 규제 문제다. 스위스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4개 언어를 국어로 지정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에서는 영어와 중국어는 물론 다양한 화폐가 통용된다. 대륙횡단열도의 시·종점과 동북아 물류금융도시 허브로 부산이 거듭나기 위해선 부산을 외국어 특구로 지정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부산을 넘어 나라의 재도약을 위해 하루빨리 우물 안에서 벗어나라고 태평양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 싶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선임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