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는 중의원 의원과 건설대신, 자민당 총무회장을 역임한 고노 이치로, 종조부는 참의원 의장을 지낸 고노 겐조다. 또 부친은 일본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의원 의장을 맡은 고노 요헤이다. 그는 내각관방 장관으로 재직하던 1993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요헤이의 이런 정치 행보는 다로와 판이한 모습이다. 다로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과 관련한) 청구권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적어도 인권의식만 보더라도 아버지보다 못한 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고노 외상도 자국 정부의 과거 언행은 부인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 14일 고쿠타 게이지 공산당 의원이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도 개인 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해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일본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1991년 야나이 순지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해결된 건 한일 양국이 가지고 있는 외교 보호권을 상호 간에 포기했다는 것이지 개인의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건 아니다”라고 밝힌 것을 말한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도 지난 16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의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에 참석해 야나이 국장의 발언을 적시하며 “그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있어도 재판을 통해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 한일협정은 그것을 약속한 것”이라고 우긴다. 고노 외상은 거기에 기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살인은 했는데 죄를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궤변이다.

이러니 일본 내 전문가들도 “일본 정부의 입장과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국제법 상식에 어긋난다”고 꼬집는 게 아닌가. 진실을 외면하면 할수록 사태가 악화되기 마련이다. 아태 국제대회에 참석한 리종혁 북한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은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며 남북한의 공동대응을 강조했다. 북일관계 정상화 회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귀추가 주목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