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별로 빈틈이 없기 때문에, 또 무리를 해도 좋을 나이는 지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일들이 있다.

며칠 전에는 선배 문인의 문학상 수상식에 가지 못했다. 친정 식구들과 모여 200포기 김장을 하고 돌아와 김치통, 무와 배추 겉잎, 고춧가루와 마늘을 정리하고 양념 묻은 옷들을 빨래하고 나니 오로지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바닥난 체력은 수상식에 참가해서 축하하려던 마음을 손쉽게 물리쳤다. 2, 3년 전의 나였다면 몸살 할 각오를 하고라도 기운을 내서 참가했겠지만, 2018년의 나는 큰 갈등 없이 포기를 선택했다. 두 시간을 죽은 듯 누웠다 일어나니 아니나 다를까, 문학인 단톡방에 즐거운 언어들과 사진들이 흘러넘쳤다. 아아! 아쉬울 줄 알았지만 역시 많이 아쉬웠다.

그런 자리는 가끔이라 그런 식의 포기도 역시 가끔이지만, SNS는 날마다 포기하고 살고 있다. 밴드에 먼저 소식을 올려본 적이 없고, 광고 메일과 스펨 메일 틈에 하나씩 끼어 있는 지인들의 메일은 매번 뒤늦게 발견한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간 때는 까마득한 과거가 되었다. 페이스북 친구 요청도 겨우 몇 명만 수락하고서 그 뒤로는 어떤 사람이 친구 맺기를 요청하는지도 살피지 않고, 친구들이 올린 소식을 보는 일은 월례 행사가 되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사람을 만나는 일에는 에너지가 들고, 나는 여전히 에너지 고갈 상태라 사람 만나는 일에 소극적이다. 그나마 카카오톡은 그때그때 확인해서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놓치지 않는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기온이 떨어지고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린 때문인지, 문득 페이스북을 열고 사람들이 올린 글과 사진을 보게 되었다. 오! 놀라워라.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이 만화경처럼 펼쳐졌다. 온 힘 기울여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작은 사물 앞에서 깊은 성찰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의 공간을 공유 공간으로 꾸미려는 사람이 있었고, 함께 일한 사람들과 활동의 결과를 갈무리하는 사람이 있었고, 당당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광고하는 사람이 있었고, 소박하지만 지속적인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흥미롭고 의미 있는 행사에 참여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웃는 사람이 있었고, 모여 앉은 사람이 있었고, 책 읽는 사람이 있었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었고, 걷는 사람이 있었고, 연극 하는 사람이 있었다. 글과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노라니 아름답고도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점점 눈이 어지러워졌다.

어질어질해진 눈을 다시 들어 내 일상을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값진 하루하루를 살면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는데 나만 일상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 같아 맥이 빠졌다. 거친 바람에 휩쓸려 날아와 날카롭게 얼굴을 스쳤던 은행잎처럼 사진과 글귀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와서 부딪쳤다. 아릿하고 스산했다. 한 일이 없는 것 같았고, 올해가 가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을 다 해낼 수 없을 것처럼 힘이 빠졌다. “다들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올려서 그런 거지, 그들이라고 특별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야.” 마음속 목소리 하나가 다독거리듯 말하면 “그걸 누가 몰라? 그렇지만 나만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다른 목소리가 불만에 차서 투덜거렸다. 문제는 타인의 대단해 보이는 생활도 아니고, 나의 모자라 보이는 생활도 아니었다. 내 생활에 만족하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던 나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어떻게 어지러움을 제거하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지?”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순간, 최근에 다시 읽은 ‘열하일기’의 한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박지원이 청나라의 조광련과 함께 요술을 구경하고 난 뒤, 화담 서경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 살 때 장님이 되어 사십 년이 지나도록 때로는 발이, 때로는 손이, 때로는 귀가, 때로는 코가, 때로는 입이 눈 역할을 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두 눈이 밝아지자 모든 감각이 착오를 일으키고 눈앞의 수많은 풍경은 온갖 의심을 불러일으켜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사람에게 서경덕은 “눈을 도로 감아라. 즉시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니라”고 했다는 이야기. 박지원은 이어 “오늘 우리가 요술을 구경했지만, 요술쟁이가 우리를 현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사람 스스로가 현혹되었을 뿐입니다”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알겠다. 서경덕 선생과 박지원 선생이 하는 말이 나를 일깨운다. 다른 이들이 나를 현혹한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의 글과 사진에 현혹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올린 부지런한 삶의 결과를 마치 요술 보듯 신기해한 내가 틀렸던 것이다.

올해 남은 한 달. 내 앞에는 해내야 할 과제들이 촘촘히 놓여 있다. 그래, 눈을 감고 길을 가자. 온몸으로 더듬어 앞으로 나가자. 새롭고 반짝이는 열두 달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동화작가